Page 151 - 오산시사1권
P. 151

149


                                                                                                                  생활환경  /  지명유래












                                                그림 13. 1999년 청학동 우시장 전경

                                                                    자료 : 『사라지는 시간 경기도의 5일장』 경기문화재단, 2000.




                  제3절   오산장과 독립만세운동



                    역동적인 생업의 현장이자 사람들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오산장에는 큰 자부심의 역사
                  가 깃들어있다. 그것은 바로 ‘독립만세운동’의 기억이다.

                    오산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의 움직임은 1919년 3월 14일 성호면 오산리에서 시작되었으나 삼엄한
                  경계로 인해 본격적인 활동은 펼쳐지지 못했다. 그러던 중 3월 25일과 26일 오산공립보통학교(현 성

                  호초) 졸업생과 천도교도들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일제의 진압에 의해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불붙기 시작한 움직임은 점차 거세기지 시작했다. 대망의 3월 29일은 음력 2월 28일로

                  장이 서는 날이었다. 당시 장터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표적인 곳이었기에 독립만세운동은 전국
                  적으로 장날에 주로 행해졌는데 오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유진홍이었다. 그는 오산 세교동 출신(당시 성호면)으로 고
                  종황제의 국장에 참석하고자 상경해 있던 중,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을

                  목격하였다. 이를 오산에서도 실행할 것을 결심, 오산으로 내려와 공칠보, 김경도, 김용준, 안낙순,
                  이규선, 정규환 등의 동지를 규합하였다. 어느 정도 인원이 모아지자 의거 실행을 모의하고 독립선언

                  서와 태극기를 제작·준비하였다.
                    오후 3~4시경 유진홍을 비롯한 주모자들은 오산장에 모인 400여 명의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눠

                  주었고, 5시경 시위대는 성호면사무소와 오산경찰주재소로 향했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상황은
                  매일신보 기사에도 상세히 실려있다.
   146   147   148   149   150   151   152   153   154   155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