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3 - 오산시사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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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촌대교(다리)                                                                                     201

                    오안교라고도 하였으며, 지방도 302호선에 위치한다. 남촌에서 발안 방면의 오산천을 건너는 다                                          생활환경
                  리로 연장 110m, 폭 25m로 1991년에 준공되었다. 그런데 이 다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나무다리로 되

                  어 있었으며 그것을 6·25한국전쟁 이후 시멘트 다리로 놓았다가 1991년 현재의 다리로 다시 놓은                                          /  지명유래

                  것이다.


                  ■ 뚝방(둑)

                    오산천을 끼고 내려가는 긴 둑을 이르는 말이다.





                  제3절    궐동(闕洞)



                    오산화성궐리사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궐동의 범위는 매우 넓
                  어 오산천변의 북쪽을 경계로 하여 남촌동으로 된 대호밭, 궁터도 궐동이었다. 특히 궐동의 지명은

                  오산화성궐리사가 생기면서부터이기 때문에 아주 오래된 마을이다.


                  ■ 궐동(마을)

                    우리나라에서 궐리사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사당은 단 두 곳으로 하나는 오산시의 화성궐리사이

                  고, 하나는 논산시의 노성궐리사이다. ‘궐리’란 공자가 살았던 노나라 곡부의 향리에서 유래된 지명이
                  다. 오늘날 오산시 궐동의 유래도 여기에서 찾아진다. 오산화성궐리사는 바로 공자의 가르침을 알리

                  고 배우기 위해 설립된,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것이다. 정조대왕의 칙명으로 오산화성궐리사가 건립
                  된 이곳은 처음에는 서원(서당)이었다. 이 서원을 만든 사람은 조선 중종 때의 경기·황해 감사와 대

                  사헌을 지낸 공서린(孔瑞麟, 1458~1541)으로 공자의 64세손이다. 공서린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사우 앞뜰의 은행나무에 북을 매달아 두고 문하생들의 학문을 감독하고 독려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죽고 나자 이 은행나무도 자연 말라 죽고 말았다. 그 뒤 정조 16년(1792) 10월 3일 정조가 전교
                  를 내려 오산화성궐리사를 다시 건립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4월 정당(正堂)과 동·서재가 준공되었

                  다. 사우의 편액도 정조의 어서로 사액되었다. 이때 정조가 특명을 내려 오산화성궐리사를 건립하면
                  서 은행나무를 다시 식수하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오산화성궐리사도 훼철되었다가 1900년 사당이 중건되었고 이듬해 강당이 세워졌다. 1981년 강당이
                  중건되었고, 1993년 중국 산동성이 기증한 공자의 석조석상이 안치되었다. 2009년에는 한국 최초로

                  행단이 궁궐식으로 건축되었으며, 2017년에는 인성학당이 건축되었다. 옛 구정촌이다.


                  ■ 구정촌(九井村)(마을)

                    오산화성궐리사가 있는 곳의 옛 명칭으로 구정말이라고도 하였으며, 근처에 물맛이 좋은 우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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