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8 - 오산시사1권
P. 208
제5장 신장동(新場洞)
1989년 궐리의 일부와 수청리, 금암리, 내삼미 1리와 2리, 은계리를 통합하여 10통 70반으로 동이
되었다. 원래 1789년(정조 13)에는 시봉면, 삼미면 지역이었으며, 1899년에는 문시면 지역과 초평면
지역으로 있다가 1914년 문시, 초평, 그리고 어탄면으로도 포함되었었다. 신장동 지역은 조선시대 중
규면 구정촌이라는 색다른 지명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규면이라는 지명은 다른 문헌에는
그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공씨 족보에 등장). 신장동은 오산화성궐리사를 중심으로 오랜 세월 동안
마을 형성에 크게 이바지한 곳으로 최근에는 대형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면서 한때 오산의 6개 동 가
운데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 하였다.
■ 새장터(마을)
신장동의 궐동에 있는 땅이름이다. 6·25한국전쟁 이후 오산천 변에 새로 생긴 장터라 하여 붙여
진 이름으로 쇠장터라고도 불렸다. 오산동의 싸전시장(미시장)의 대항적 시장이기도 하였는데, 우시
장만이 형성되어 남으며, 이 우시장도 청학동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발안으로 이전되고 우시장은
없어졌다. 예전에는 이곳의 우시장이 유명하여 붙여졌다고도 한다. 새장터의 한자 이름이 신장동(新
場洞)이다.
제1절 내삼미동(內三美洞)
삼미동은 원래 주변에 소나무가 많아서 소나무골, 즉 송리(松里)라 불렸는데 조선시대 정조가 아버
지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화산으로 천봉할 때 행차하여 경기도관찰사에게 마을 이름을 물으니, ‘문
시면 송리’라고 아뢰었다고 한다. 정조가 ‘문시에는 오동나무, 죽미에는 대나무, 삼미에는 소나무가
아름답고 많으니 삼미라고 부르라’하여 삼미가 되었다고 전한다. 마을의 안쪽은 ‘안삼미’ 즉 내삼미가
오산시사
되었으며, 바깥쪽은 외삼미가 되었다고 전한다. 내삼미 1동과 2동이 철로로 마을이 나누어지게 되었
다. 1동과 2동을 분리하여 기술한다.
제
1
권
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