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8 - 오산시사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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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애써 지키려는 주민들의 생각으로 판단된다. 황구지천에 놓였던 돌다리 대황교(大皇橋)는 사도세
                  자의 묘소인 현융원에 옮겨져 재현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화성시 양감면 사창리에 새로운 사창(社倉)을 두었다. 독산성에서 불과 8km의
                  가까운 거리이다. 2천여 년의 세월 동안 황구지천의 하상(河上)이 높아져 아산만의 공진창으로 연결

                  되는 조운선의 운행이 불편하였던 것이다.


                  3) 구원(狗原)

                    수원의 옛 이름으로 판단되는 구원(狗原)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등장한다. 다음은 『삼국사기』 백

                  제본기 진사왕 8년(392년)의 기록이다.
                    “고구려왕 담덕(談德)이 병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북변을 쳐서 석현(石峴)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용병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 이북의 여러 부락이 함락되었다. 10
                  월에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狗原)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10일이 지

                  나도 도성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11월에 왕이 구원(狗原)의 행궁(行宮)에서 죽었다.”
                    이 기록에 등장하는 구원행궁(狗原行宮)은 화성시 안녕동의 수원고읍성(水原古邑城)을 가리킨다고

                  판단된다. 지금의 지명 황구지천(黃狗之川)과 수원(水原)에 구원(狗原)이 담겨있고, 조선 정조대왕이
                  세운 화성행궁(華城行宮)이 아직도 수원에 건재하기 때문이다.

                    일본서기는 백제 구원행궁에서 벌어진 진사왕의 사망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한다. 『삼국사기』의 기
                  록과 다르다. 다음은 『일본서기』 응신천왕 3년(392년)의 기록이다.

                    “백제 진사(辰斯)가 왕위에 올라 귀국(貴國)의 천황에게 실례하였다. 그래서 기각, 우전시대, 석천,
                  목토를 보내어 그 무례함을 책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니 등은

                  아화(阿花, 阿芳)를 왕으로 바꿔 세우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진사왕 여
                  휘는 조카 아화의 세력에 의해 제거된 것이 분명하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는 진사가 왕위에 오른 과정도 다르게 기록한다. 『일본서기』는 숙부 진사가
                  태자 아신(阿莘)에게 돌아가야 할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태자 아화의

                  나이가 어리므로 숙부 진사가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한다. 진사왕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백제기(百濟
                  記)』를 옮긴 『일본서기』가 오히려 타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백제 북진의 요충 관미성을 빼앗긴 진사왕은 구원행궁(狗原行宮)에서 사냥을
                  하였다. 사냥으로 군사를 조련하며 관미성 탈환을 준비하였다. 그 와중에 왜 응신천황이 보낸 4명의

                  왜장과 조카 아화(阿花)의 세력에 의해 제거된 것으로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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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유는 불을 보듯 분명하다. 백제 진사왕이 백제의 영토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한수(漢水) 이북의 10여 성과 서해의 요충 관미성(關彌城)을 빼앗기는 무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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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드러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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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0년에 발간된 『일본서기』와 1145년에 발간된 『삼국사기』의 기록을 종합하면 백제 진사왕 여휘는
                  조카 아화의 세력에게 살해된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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