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9 - 오산시사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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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구원행궁은 곧 독산성과 수원고읍성을 가리킨다고 판단한다. 수원고읍성은 행궁이고 독산성 47
은 행궁을 호위하는 산성으로 본다.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도 평지 도성의 호위를 위하여 산성을 두 생활환경
었다. 고구려는 국내성과 환도산성을 두었고 백제는 한성과 위례성(남한산성)을 두었다. 조선 태종
이방원과 세종 이도, 사도세자 이훤과 정조 이산도 독산성과 오산원에 머물러 온양온천에 다녀왔다. / 지명유래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빼앗긴 백제 관미성의 위치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그런데 『삼국
사기』의 기록을 자세히 살피면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고 본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광개토왕 2
년(392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7월에 왕은 남으로 백제를 쳐서 10성을 빼앗았다. 10월에 백제의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
은 사면초절(四面峭絶)하고 바다로 둘러 싸여(海水環繞) 있으므로, 왕이 군사를 7도(七道)로 나누어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하였다.”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백제의 관미성은 지금의 강화군이 틀림없
다. 고구려 군사가 7도로 공격한 것은 7개의 섬이었던 4세기의 강화군을 의미한다. 사면초절하고 해
수환요하였다는 지형도 강화군에 비정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강화군이 강화도, 석모도, 교동도로 통
합된 것은 13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1231년에 몽골의 침입을 받은 고려 정부는 수도를 강도(江都)로 이전하였다. 무려 10만 명에 이르
는 개경의 백성이 강화군으로 이주하자 식량이 부족하였다. 이후 고려 정부는 강화군민과 군사들을
독려하여 끝없는 간척사업을 벌였다. 그런 까닭으로 본래 7개의 섬이었던 강화군은 강화도, 교동도,
석모도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른 장소는 단연 강화도였다. 불과 1백 년 전에도 강화도에는 5진
7보 53돈대를 두어 외침을 막아 고려의 수도 개경과 조선의 수도 한양을 지키던 관문(關門)이었다.
『고려사』에서는 강화도 마니산참성단에서 단군이 제사를 지냈다고 언급하고 있다. 지금도 해마다 개
천절에 이곳에서 제천행사가 열리고 전국체전을 앞두고 성화를 채화한다.
백제 진사왕이 구원행궁(狗原行宮)에서 머물렀던 것은 수군(水軍)으로 관미성(關彌城)을 되찾기 위
한 훈련이었을 것이다. 독산성과 구원에서 군사를 조련하여 서해의 당항성(黨項城, 남양읍)을 통하여
관미성(강화군)을 회복하려던 것으로 판단한다.
4) 부산(釜山)
삼국시대 백제의 산 이름은 거의 외자였다. 한산(漢山), 관산(冠山), 독산(禿山), 부산(釜山), 사산
(蛇山), 와산(蛙山) 등이 이를 증명한다.
『삼국사기』 백제 고이왕(古爾王) 5년(238년) 2월에 등장하는 부산(釜山)은 지금의 오산시 부산동(釜
山洞)이다. 보다 넓은 영역으로는 용인시 부아산과 화성시 동탄신도시와 오산시 전체를 가리킨다고
판단한다.
『삼국사기』 권 제35 雜志 地理 二는 “신라의 진위현(振威縣)은 본래 고구려의 부산현(釜山縣)이었
다.”고 기록한다. 고구려가 지배하기까지 고구려의 부산현은 백제의 부산이었다는 사실이다. 신라의
진위현이 곧 오산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