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오산시사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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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의 해석에 차이가 있지만, 온조 일행이 올랐던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岳)은 경기도 용인의 49
부아산(負兒山)이다. 부아산에 올랐던 비류와 온조가 갈라선 곳은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가 생활환경
갈라지는 용인 신갈이었다. 용인시 상갈동과 하갈동, 신갈동과 구갈동이 위치한 신갈인터체인지가
비류와 온조가 갈라선 갈래길이었다. / 지명유래
경기도 수원과 용인이 한산이었다는 것은 김정호가 제작한 <신라구주군현총도(新羅九州郡縣叢
圖)>에 근거한다. <신라구주군현총도>는 백제의 한산을 한주(漢州)로 기록하는 것이다. 지금도 한강
(漢江)의 북쪽은 북한산(北漢山)이고 한강의 남쪽은 남한산(南漢山)이다. 신라의 한주(漢州)가 고구려
의 한산군(漢山郡)이고 백제의 한산(漢山)이었다.
이 기록의 하남(河南)은 경기도 안성시와 평택시의 남쪽을 가리킨다. 하남이 안성과 평택의 남쪽이
라는 사실 또한 <신라구주군현총도>에 근거한다. <신라구주군현총도>는 지금의 평택 지역을 하팔현
(河八縣)으로 기록한다. 이 지역에 위치하는 8개의 하천-황구지천, 오산천, 진위천, 안성천, 한천, 청
룡천, 입장천, 성환천이 하팔(河八)이었다고 판단한다.
여덟 개 하천은 안성천에 합류하여 아산만으로 흘러나간다. 아산만에 고려시대 최대의 사창 하양
창(河糧倉)이 있었다. 하팔현, 하양창이 위치하는 안성천이 곧 하수(河水)였던 것이다. 한수(漢水, 한
강)를 하남으로 보는 시각은 틀렸다고 판단된다. 한수의 남쪽이면 한남(漢南)이어야 한다. 고려 목종
8년(1005년)에 수원의 명칭이 한남(漢南)이었다는 것에 근거한다.
하남이 안성천 남쪽의 충청남도 직산이라는 근거는 평택시 진위면 하북리의 지명에도 담겨있다.
경기도와 충청도를 경계하는 안성천이 곧 하수였던 것이다. 안성천의 북쪽인 경기도 평택, 안성이 하
북이고, 안성천의 남쪽인 충청남도 직산과 성환이 하남이었다. 지금도 경기도 300번 시외버스는 안
양과 하북의 이름표를 달고 두 지역을 오고간다.
온조가 세운 백제의 초도 하남 위례성은 하수의 남쪽인 천안시 직산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과 조선
세종 이도가 온조왕사당(溫祚王祠堂)을 직산에 세운 것에 근거한다.
백제 고이왕이 부산에 머무는 동안 수백 개의 가마솥이 오산천변에 걸렸을 것이다. 가마솥 외에 수
백 개의 쌀가마와 숯가마가 동원되었을 것이다. 또한, 수천 명의 군사가 왕을 호위하였을 것은 분명
하다.
‘진위(振威)’의 의미는 군사력으로 위엄을 떨친 곳이다. 백제 고이왕이 부산진(釜山鎭)과 부산동(釜
山洞)에 군영(軍營)을 설치하고 군사의 위엄을 떨쳤다는 것이다. 지금도 부아산(負兒山) 아래에 대한
민국 제3야전군 ‘선봉대(先鋒臺)’가 위치한다. 그러므로 백제의 부산은 고구려의 부산현과 신라의 진
위현에 연결되는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국가에 납세하는 모든 세곡은 수로와 육로를 이용하였다. 수
로는 강과 바다를 따라 조운선이 운반하였고 육로는 수레가 구르기 수월한 도로를 따라 우마차가 운
반하였다. 그러므로 군현의 읍치는 수로와 육로의 교통이 가장 편리한 곳에 두었다.
1623년에 발간된 <지나조선고지도(支那朝鮮高地圖)>와 1682년에 제작된 <동여비고(東輿備攷)>의
수원부지도가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위의 두 지도에는 수원(水原)의 동화역(同火馹)과 진위(振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