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8 - 오산시사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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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암동(金巖洞)
금암동이 처음 등장한 문헌은 光武 3년(1899년)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이다. 이 읍지에 금암동의
명칭은 문시면 묵암동(墨巖洞)이다. 1914년 4월 1일, 일제가 실시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문시면 검암
동(黔岩洞)이 되었다. 마을에 ‘검바위’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마을에 잘생긴 바위가 있어 ‘금
바위’라고 불러왔는데 이를 한문으로 쓰면서 금암동(錦岩洞)이라고 유래되었다고 본다.
1915년 1월 29일 수원군 성호면 금암리가 되었다.
1988년 12월 2일 금암동의 지석묘군(支石墓群)이 경기도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선사시대의
지석묘군으로 금암동은 오산시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로 추정된다. 오산천과 황구지천 사이에 위치한
금암동이 신석기인의 수렵생활과 어로생활에 유리한 지형이기 때문이다. 모암(母巖)에서 고인돌을
채취하던 흔적이 생생하게 남은 금암동고인돌공원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의미있는 선사유적의 현장
이다.
2) 내삼미동(內三美洞)
내삼미동은 동네 주변에 아름다운 소나무가 많아서 소나무골, 즉 송리(松里)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花山)으로 천봉할 때 삼미로 바뀌었다고 한다.
정조가 마을 이름을 묻자 경기관찰사가 ‘문시백 송리’라고 아뢰었다. 그랬더니 마을을 바라보던 정
조가 이르기를 ‘송산골은 금로대송(錦老大松)이 울창하고 아름다우며, 점이골(현 죽미령)의 대나무골
과 대량골에 대나무가 아름다우며, 문시와 오미의 오동나무가 아름답구나. 이제 이곳을 삼미(三美)라
칭하라’ 하여 삼미가 되었다고 한다.
정조 재위 연간의 『수원부읍지』에 삼며곡면, 삼미면으로 표기되어 삼미가 조선시대 오산의 면(面)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경부선철도가 반월봉의 능선을 횡단하여 내삼미리와 외
삼미리로 분리되고, 내삼미리에서 수청리가 분리되고, 또 다시 철도를 경계로 내삼미 1리와 내삼미 2
리가 분리되었다.
3) 수청동(水淸洞)
수청말이라고도 하였으며 옛날부터 맑은 물이 흐르고 늘 솟는 샘터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순조
(純祖) 31년(1831년)에 발간된 『화성지(華城誌)』에 문시면 옹동(瓮洞)이었다.
옹동에서는 흉년에 경기도민을 구휼(救恤)할 옹기(쌀독)를 제작하였다. 그 전통은 일제강점기인 대
오산시사 한제국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두 섬들이 ‘京畿敃糧瓮(경기민량옹)’의 제작 활용이었다.
4) 은계동(銀溪洞)
제
1 은개 혹은 위개라고도 하였다. 원래는 화성군 동탄면 금곡리(金谷里)였으나, 1987년 1월 1일 오산읍
권
에 편입되어 은계리(銀溪洞)가 되었다. 필봉산 남쪽에 위치하며 은빛처럼 맑은 은여울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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