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0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P. 60
인 오산화성궐리사를 개설한 것은 이곳을 조선 유림의 총 본산으로 만들어 유림들
로 하여금 공자의 충(忠) 사상을 통해 그들의 단합된 힘을 정조 자신에게로 집중케
하는 것이 왕권 강화를 위한 실질적 대책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조선의 백성, 즉 자신의 백성들 삶을 책임지는 따뜻한 왕권의 단초라 여겼던 것이
다.
이러한 의중을 담고 정조는 경기 감사에 명해 공부자의 성문을 보수토록 하고 공
자가 살았던 중국 노나라에 있는 궐리사를 본떠 사액하고 당시 화성부 중규면 구정
촌의 동명을 궐리로 개칭케 하니 이로부터 오산화성궐리사란 공자의 성묘가 이 땅
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화성궐리사 은행나무, 수령이 근 500년(470년)으로 추정된다
정조가 신도시 조성 계획을 위해 1794년 화성성역사업을 착수하기 2년 전인 1792
년(정조16년)에 수원(화성) 고적을 탐사하였는데, 화성부 중규면 구정촌이 중종 때
경기·황해감사와 대사헌을 역임하고 기묘사화의 명현으로 이름난 공서린이 낙향하
여 후학을 양성하던 서원의 유허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정조는 오산화성궐리사를
개설하기 위해 공자의 후손을 우대하는 방안을 마련하라 지시하고 공서린에게 문헌
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1792년 당시 기백은 왕의 전교를 받고 화사를 보내 문헌공의 옛터와 서재, 그리고
우물을 도형하고 새로 자라나는 은행나무를 그려 갔으며, 같은 해 10월 7일 화성부
사가 비장을 파견해 정당의 방위를 자좌(子坐, 북쪽을 등지고 남쪽으로 건물을 배
치함)로 정하고 다시 비장 박동철과 가의 이원형을 감독관으로 삼아 정당 터를 개
토함으로써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다음 해인 1793년 4월 2일 정당의 수주 상량을 시작으로 동서재와 내삼문 그리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