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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麻田)·송림(松林)·연주(漣州)·고봉(高峯)·교하(交河)·금주(衿州)·양천(陽川)·남양(南陽)·
안산(安山)·인주(仁州)·토산(兔山)·안협(安峽) 등이 배속되었다. 경기 우도는 개성(開城)·강음
(江陰)·해풍(海豊)·백주(白州)·연안부(延安府)·평주(平州)·재령(載寧)·강화(江華)·진강(鎭
江)·하음(河陰)·교동(喬桐)·서흥(瑞興)·우봉(牛峯)·신은(新恩)·협계(俠溪)·수안(遂安)·곡주
(谷州)·부평(富平)·동성(童城)·통진(通津)·수안(守安)·김포(金浦)·덕수(德水) 등으로 재편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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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당시의 경기 좌우도를 지리적으로 구분하면 다음의 (그림 1)이다.
그림 1. 조선 초기의 경기 좌우도와 오산 지역
위의 (그림 1)의 경기 좌우도에서 오산지역은 하단의 동그라미인 경기 좌도에 속한다. 오산지역의
경계를 『세종실록』 지리지의 내용과 비교해 보면, 동쪽으로 용인(龍仁), 서쪽으로 쌍부(雙阜) 바라곶
이[八羅串], 남쪽으로 충청도 평택현(平澤縣)의 유지두(酉只頭), 북쪽으로 과천(果川)에 이르는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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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다. 물론 당시의 오산 지역은 수원 도호부의 서남부에 행정적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오산은 삼남에서 도성으로 들어가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며 기전(畿甸)의 중심과 해양을 연결하
오산시사
는 경기도의 주요 행정 지대였다.
제
2
권
20) 『태조실록』 권6, 태조 3년 6월 23일(신묘).
114 21) 『세종실록』 권148, 지리지, 경기 수원 도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