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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漢城)이었다. 삼한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오산의 독산성과 화성의 수원고읍성이 경기 남서부
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침류왕 1년(384년)에 “7월에 사신을 진(晉)에 보내어 조공하였다. 9월에 호승
(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진에서 들어오니 왕이 그를 맞이하여 궁내에 두고 예경하므로 불법이
이로부터 비롯하였다. 2년 2월에 한산(漢山)에 불사(佛寺)를 세우고 10명의 승려(僧侶)를 두었다.”고
기록하였다.
침류왕이 불사를 세운 한산은 지금의 경기도이다. 백제의 한산(漢山)은 고구려의 한산군(漢山郡)이
었고 신라의 한주(漢州)였다. 지금의 경기도 광주, 용인, 수원, 오산, 화성이 한주이자 한산이었다. 10
명의 승려를 한산에 두었다고 하였으니 사찰의 수효는 최대 10개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독성산 보적
사도 침류왕 때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 8년(392년)에 “왕이 구원(狗原)에 있었는데 10일이 지나도 도성으로 돌
아오지 않았다. 11월에 왕이 구원행궁(狗原行宮)에서 죽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 등장하는 구원행궁(狗原行宮)의 구원(狗原)은 지금의 황구지천(黃狗之川, 皇口之川)과
수원(水原)을 가리키고 행궁(行宮)은 수원고읍성(水原古邑城)을 가리킨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백제
진사왕 여휘(餘暉)의 죽음은 『삼국사기』 보다 『일본서기』가 더욱 자세하게 기록하여 매우 흥미롭다.
『일본서기』 응신천왕 3년(392년)에 “진사(辰斯)가 왕위에 올라 귀국(貴國)의 천황에게 실례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국은 진사를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니 등은 아화(阿花)를 왕으로 바꿔 세우고 돌아
왔다.”고 기록하였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아화왕(阿花王, 阿華王)은 백제 아신왕(阿莘王, 阿芳王)이다. 아화왕은 침류
왕의 태자이자 진사왕의 조카였다. 『일본서기』는 숙부 진사에게 왕위를 빼앗긴 아화가 왜 응신천황의
도움으로 진사왕을 제거한 것으로 기록한다.
이 기록은 백제 침류왕이 곧 왜 응신천황일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백제 제15대 침류왕(枕流
王, 384~385)과 왜 제15대 응신천황(應神天皇, 390~430)은 세위(世位)가 같고 동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백제기』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고 기록하는 『일본서기』가 왜 응신천황의 이름을 예전
(譽田)으로 기록하기 때문이다.
침류왕의 조왕 근초고왕의 이름이 여구(餘九)이고 부왕 근구수왕의 이름이 여수(餘須)인 바, 침류
왕의 이름은 여전(餘田)이었을 것이다. 백제 왕가의 성씨인 부여(夫餘)와 여(餘)는 중국말로 ‘부예’와
‘예’로 발음된다.
오산시사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는 영락 6년(396년)에 있었던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왕이 궁
솔수군(躬率水軍)하여 백잔(百殘)과 이잔(利殘)의 58城을 공취하였다.”
여기서 백잔은 백제의 잔존세력을 의미하고, 이잔(利殘)은 백제를 이롭게 돕는 마한의 잔존세력을
제
1 의미한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광개토왕비문 제3면 14행에 수원과 오산의 옛 지명인 모수성(牟水城)
권
이 등장한다.
모수성은 백제에 흡수된 마한 모수국(牟水國)의 이름으로 파악된다. 오산시 지곶동의 독산성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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