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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의 토성 처인성(處仁城)의 부민들은 몽골군과 공방전을 벌였다.
때마침 이곳에 머물러 있던 승려 김윤후는 적장 살리타를 사살하였다. 전세가 불리한 몽골군은 부
장 철가의 인솔로 북으로 철수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처인부곡은 수원도호부 처인현(處仁縣)으로
승격되었다. 처인부곡의 전투는 수원도호부의 오산과 용인 시민들의 승리였다.
원종 12년(1271년)에 몽골병이 대부도(大部島)에 침탈하자 숭겸(崇謙) 등이 몽골병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시기는 항몽투쟁을 주장하던 무신들이 물러나고 려·몽 화친을 주장하는 문신들이 고
려 정권을 회복한 때였다. 이러한 때에 대부도의 주민들이 몽골병을 살해하는 사건이 나자, 수주부사
안열(安悅)이 반란을 진무하였다. 부사 안열이 사건을 원만히 해결하자 왕이 그 공로를 인정하여 수주
(水州)를 수원도호부(水原都護部)로 승격시켰다. 얼마 후에 수원목(水原牧)으로 또다시 승격되었다.
충선왕 2년(1310년)에 전국의 목(牧)을 폐지하여 수원목이 수원부(水原部)로 바뀌었다.
공민왕 11년(1362년)에 홍건적이 침입하여 양광도의 각 주군(州郡)에 항복을 권유하였다. 이때 수
원부의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항복하여 적의 세력을 더욱 강성하게 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왕이 수원부
를 수원군(水原郡)으로 강등시켰다. 이때 안성현(안성군)의 현민들은 투항을 가장하고 연회를 베풀었
다. 적들이 술에 취하자 이 틈을 타서 적장 6명을 죽이고 적을 섬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안성은 작은 현(縣)임에도 불구하고, 수원부의 부곡(部曲)이었던 양량(陽良), 감미탄(甘彌呑), 마전(馬
田), 신곡(薪谷) 등을 이속받았다.
적군에게 투항하여 명호를 강등당한 수원군은 4년 후에 다시 수원부로 승격되었다. 수원군민들이
당시의 재상 김용(金鏞)에게 청원하여 안성으로 이속되었던 부곡 4곳 중 3곳을 환속 받았다. 재상 김
용은 안성군을 본관으로 하는 신라 내물왕의 후손이었다. 당시 수원부가 직할하던 7개 속현(屬縣)은
안산현(安山縣), 영신현(永新縣), 쌍부현(雙阜縣), 용성현(龍城縣), 정송현(貞松縣), 진위현(振威縣),
양성현(陽城縣)이었다. 삼국시대 이후 고려시대까지 수원부의 읍치는 독산성에 있었을 것으로 판단
된다.
7.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태조 3년(1394년)에 왕이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이때 양광도 수원
부를 경기도 수원부로 개편하였다.
태종 16년(1416년) 계미(癸未)에 왕이 “수원부(水原部) 오산(烏山)에 머물렀다.”고 기록하였다. 태종
오산시사 이방원이 온양온천 온행(溫幸) 중에 독산성에 머무른 기록으로 판단된다. 정적을 많이 만든 태종은
신변안전의 호위 군사를 두어 늘 주변을 경계하였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태종 13년(1413년)에 왕은 전국을 8道로 나누고 지방 제도를 개혁할 때 수원부는 수원도호부(水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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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都護部)로 승격되었다.
세종 15년(14233년) 을사(乙巳)에 “대가(大駕)가 수원부(水原部) 오산원(烏山院)에 이르니 부사 조
극관(趙克寬)이 와서 뵈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 또한 세종 이도(李祹)가 온양온천 온행(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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