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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1,000명을 풀어 적의 퇴로를 기습해 3천여 명의 왜병을 베니 삼천병마동이었다. 지금의 화성시 봉
담읍과 팔탄면의 삼천병마로가 그 현장이다.
선조 35년(1602년)에 왕은 수원부사 변응성(邊應星)에게 경기방어사(京畿防禦使)를 겸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전란에 대비하여 도성을 호위하는 산성을 쌓도록 하였다. 오산의 독성산성과 용인의
석성산성과 광주의 남한산성을 개축하여 국방의 요충지로 삼았다.
변응성의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자는 기중(機仲)이다. 아버지는 변협(邊恊)이며 공조판서 겸 도총
관이었다. 임진왜란에 이르러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경기방어사가 되었다. 변응성은
토성이었던 독산성을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다. 그의 자(字)가 기중(機仲)이고 그의 아비 변협이 공
조판서를 지냈다는 데서 그가 거중기(擧重機)와 같은 군자기계(軍資機械)를 잘 다루는 인물이었음을
알겠다. 지금도 독산성 입구에 변응성선정비(邊應星善政碑)가 남아 있어 더욱 분명한 근거가 된다.
인조(仁祖) 1년(1632년)에 발간된 <지나조선고지도(支那朝鮮古地圖)>에 수원부의 읍치가 표기되었
다. 그 위치는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 화산 기슭의 수원고읍성이었다. 조선시대 수원부(水原部)의 위
치는 지금의 융건릉이 들어선 수원고읍성이었다.
<지나조선고지도>에는 조선시대 진위현(振威縣)의 읍치도 표기되었다.
진위현을 둘로 나누어 송촌활달(松村活達)과 부산연달(釜山淵達)로 기록하였는데 그 위치는 평택
시 송탄읍과 오산시 부산동이었다. 송촌활달(松村活達)은 지금의 평택시 송탄읍을 가리키고 부산연
달(釜山淵達)은 지금의 오산시 부산동을 가리킨다.
숙종(肅宗) 8년(1682년)에 발간된 『동여비고(東輿備攷)』 <수원부지도>에 청호역(菁好驛)이 나타난
다. 그 위치는 오산천의 동쪽 성호고등학교 주변으로 표기하였다.
영조(英祖) 26년(1750년) 9월에 왕 이금(李昑)이 온행(溫幸)에 나섰다. 피부가 가려운 증세를 치료
하고자 온양온천을 다녀왔다. 56세에 이른 영조는 대가(大駕)를 타고 행차하였을 것이므로 오산시 남
촌동 궁기리(宮基里)의 오산원(烏山院)에 머물렀을 것이다.
영조(英祖) 36년(1760년) 7월에 세자 이훤(李愃, 사도세자)이 말을 타고 온행에 나섰다. 다리에 난
습창(濕瘡)의 치료가 목적이었다. 세자는 독산성에 머물러 호위군사와 주민들에게 양곡 20석을 풀어
대접하였다. 또 임진왜란을 기억하며 장대에 올라 여러 대의 활을 쏘았다.
정조(正祖) 13년(1789년)에 왕 이산(李祘)이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곶산(串山)으로 이장
하였다. 고산 윤선도(尹善道)가 국중(國中)의 명당으로 인정한 지금의 화산(花山)이었다. 정조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 “고산(孤山)은 제2의 무학(無學)으로 불릴 만큼 풍수지리에 밝았다.”고 기록
오산시사 한다.
현륭원(顯隆圓) 또는 화산릉(花山陵)으로 불린 사도세자의 묘는 이런 과정으로 수원고읍성 터에 조
성되었다. 사도세자와 정조임금의 묘소인 융건릉(隆建陵)은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87-1의 화산에
제
1 나란히 위치한다. 국중(國中)의 명당으로 이름난 곶산(화산)의 수원고읍성(水原古邑城)은 백제 구원
권
행궁(狗原行宮)이 있었던 자리로 판단된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기에 앞서 수원고읍성의 성민을 지금의 수원시 팔달산 아래로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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