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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켰다. 그리고 구원(수원)의 너른 들에 신도시를 계획하였다. 팔달산 동쪽에 읍치(邑治)와 행궁(行                                         41
                  宮)을 세우고 화성(華城)과 화성행궁(華城行宮)으로 명명하였다.                                                             생활환경

                    그런데 백제 아화왕(阿花王,阿華王)의 이름에 담긴 화(花, 華)가 화산(花山)과 화성(華城)에 그대로
                  담겼다. 효성의 군주 정조임금이 사도세자의 묘를 쓴 화산(花山)과 신도시 화성(華城)에 그대로 담겼                                          /  지명유래

                  다. 어찌된 일일까? 이것은 사업 추진에 앞서 정조가 『일본서기』도 살펴 읽은 것으로 판단된다. 수원
                  고읍성이 본래 백제 구원행궁이었음을 알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고읍성 터에 쓰고 독성산을 향로봉(香爐峰)으로 개칭하였다. 비문을
                  지어내리고 수원부사에게 명하여 해마다 독산성의 토지신에게 제례하였다. 수원고읍성에서 쫓겨난

                  수원 백성과 구원행궁을 빼앗긴 토지신(土地神)을 달랜 것으로 판단한다.
                    정조 13년(1789년)에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벼슬길에 나섰다. 그는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등의

                  언관이 되어 임금에게 여러 정책을 상주하고 간언을 하는 소임을 맡았다. 정조는 젊고 재기발랄한 정
                  약용을 측근에 두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문을 구했다. 다산(茶山) 정약용은 고산(孤山) 윤선도

                  의 외증손(外曾孫)이다. 정조 이산이 윤선도의 손자 정약용을 특별히 골라 쓴듯하다.
                    정조 이산(李祘)은 아버지 사도세자 이선(李愃)의 묘를 찾아 매년 몇 차례에 걸쳐 화산 능행길에 올

                  랐다. 이때 한강에는 배다리(舟橋)가 놓였다. 정약용은 이 배다리 설치를 맡게 되었고 그 일을 훌륭히
                  해냈다. 이어 화성 축성에 이르러 설계도와 기구를 만드는 일 또한 그가 맡았다.

                    다산은 일꾼들이 무거운 돌을 힘겹게 올리는 것을 보고 기구의 발명에 골몰했다. 또한, 기하학적
                  방법으로 성의 거리, 높이 따위를 측량해 가장 튼튼하고 아름다운 읍성을 쌓기 위해 연구했다. 마침

                  내 그는 거중기(擧重機)와 활차(滑車, 도르래), 고륜(鼓輪, 바퀴달린 달구지) 등을 발명해 축성의 어려
                  움을 해결하였다.

                    정조(正祖) 13년(1789년)에 발간된 『수원부읍지(水原部邑誌)』에 의하면 현재의 오산에는 청호면(靑
                  好面), 시봉면(市峰面), 삼미면(三美面), 산성면(山城面), 초평면(草坪面)의 5개 면이 있었다.

                    청호면(靑好面)에는 오매리(烏梅里)와 부산리(釜山里)가 있었다. 시봉면(市峰面)에는 곡촌리(谷村
                  里)와 세교리(細橋里)가 있었다. 삼미면(三美面)에는 중변리(中邊里), 자안리(茨安里), 금곡리(金谷里)

                  가 있었다. 산성면(山城面)에는 지곶리(紙串里)와 양산리(陽山里)가 있었다. 초평면(草坪面)에는 가사
                  리(加士里)와 사오화리(沙五火里)가 있었다.

                    정조 17년(1793년)에 발간된 『수원부읍지(水原部邑誌)』의 지도에 의하면 청호, 시봉, 초평, 삼미, 산
                  성면 외에 어탄(魚呑,동탄)의 일부도 오산 지역이었다.

                    순조 31년(1831년)에 발간된 『화성지(華城誌)』는 오산지역을 4개 面으로 기록한다. 청호면, 초평면,
                  산성면 외에 삼미면과 시봉면을 통합하여 문시면으로 기록한다.

                    문시면은 명학동·죽담점·묵암동·신촌·옹동·평촌·세교·관음동의 8개 동리를 두었다. 산
                  성면에는 서리·남리·지곶리·신촌리·양산리의 5개 리를 두었다. 청호면은 갈곶리·기문동·당

                  리·원통리·부산동·수덕동·천변동의 7동 리를 두었다. 초평면은 수철리·누읍리·타종리·마
                  유동·신촌·모전촌·용란리·서촌·여대리·내창동·어은굴리·대화촌·궁기리·어인포의 1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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