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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하여 임시 주정소(晝停所)를 설치하여 머물렀다. 세종대에도 왕실의 군사 의례인 강무를 오산지 123
역에서 거행하여 국왕의 행행이 의례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1435년 세종은 왕세자와 종친, 부마, 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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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 등 왕족과 관원 등을 대동하고 강무를 위해 행행하였다. 강무는 왕실의 사냥 문화가 의례화된 일 / 유적
종의 군사 훈련으로 관원은 물론 군사와 지역민이 수만 명씩 동원되는 대규모 국가 행사였다. 조선
전기에 오산지역에 국왕의 강무가 시행되었다는 것은 이 지역에 인구가 밀집되었고 물산이 풍부하여 · 유물
국왕을 비롯한 중앙의 관료들은 물론 군사에 이르기까지 의식주의 지원이 가능했음을 보여준다. 또
한 국왕의 강무가 진행되던 지역은 사냥에 적합한 넓은 평야와 낮은 산들이 있으면서 하천이 흐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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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이므로 물산이 풍부한 것은 당연하였다. 이에 부합하듯이 오산지역에서는 꿩을 비롯한 많은 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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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을 왕실에 진상하기도 하였다.
물론 국왕을 비롯한 왕족이 자주 행차하는 지역이라는 것은 혜택만이 아니라 민폐를 야기하는 요
인이 되기도 하였다. 1442년(세종 24) 양녕대군이 매사냥을 하면서 오산지역에 이르자 수령(守令)들
이 정사는 돌보지 않고 유밀과(油蜜果)를 성대히 준비했으며, 혹은 창기(娼妓)로 하여금 풍악을 연주
하게 하여 그를 위로하였다. 당시 국가의 법으로 유밀과 제조는 금령(禁令)이었음에도 종친(宗親)인
양녕대군을 접대하기 위해 금법을 위반한 것이다. 정부에서도 관료들은 수령들의 처벌을 요구했으나
세종이 종친을 보고 술자리를 베풀어 위로했던 것인데 무슨 죄가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면죄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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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이외에도 오산지역을 비롯한 경기도는 한양의 인근이었으므로 왕실의 능침과 사당이 많이 영건(營
建)되어 민력의 동원이 빈번한 곳이었다. 국왕은 이점을 간파하여 농사철에는 민인의 인력 동원을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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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시켰다. 왕실을 비롯한 국가에서 필요한 인력이 발생하게 되면 해당 시설이 설치되는 지역민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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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그 행사가 거행되는 지역 내의 도로 연변에 거주하는 민인들까지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이
에 농사의 작황이 나쁜 흉년의 경우에는 국왕이 선대왕의 능침(陵寢)에 행차하는 능행(陵幸)조차 중
지하였다. 61)
조선 전기부터 오산지역에 사람과 물자의 유통이 많았던 것 이외에도 당대의 주요 경제인 농업을
위한 육성도 진행되었다. 당시 농업의 근간이던 벼농사를 발전시키기 위해 종자를 파종하는 방법을
시험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예를 들어 1년 묵은 볍씨를 파종하게 하여 모두 싹이 나는 시험을 거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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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다른 지역에도 시행하게 하였다. 안정적인 벼농사를 진행하기 위해 농지에 수시로 물을 주입하
54) 『세종실록』 권59, 세종 15년 4월 22일(을사).
55) 『세종실록』 권70, 세종 17년 10월 10일(무신).
56) 이왕무, 『조선왕실의 군사의례』, 세창, 2019, 41~48쪽.
57) 『세종실록』 권95, 세종 24년 3월 24일(을유).
58) 『세종실록』 권98, 세종 24년 10월 15일(임인).
59) 『문종실록』 권2, 문종 즉위년 6월 19일(신묘).
60) 『성종실록』 권34, 성종 4년 9월 5일(계사).
61) 『중종실록』 권49, 중종 18년 8월 1일(무술).
62) 『세종실록』 권77, 세종 19년 4월 30일(기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