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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잘못되어 절용(節用)하는 법을 모르는 까닭이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지역별로 정부 창고에 보관된                                         127
                  환자 곡식의 수량이 상이하여 균등한 곡식 분배를 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곡식이 풍부한 곳                                          역사

                  의 창고에서 부족한 곳으로 운반하는 사례도 있었으나, 일이 번잡하고 이동 간에 발생하는 폐단으로                                            /  유적
                  문제가 많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정책으로 백성이 어느 지역에서 곡식을 수령해 가더라도 거주 지

                  역에서 갚게 하는 방식이 제시되었다. 경기도 광주(廣州)의 백성이 오산지역에서 받아가지고 광주에                                           · 유물
                  바치게 하되, 각각 가까운 곳으로 차례로 수송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82)

                    그런데 당시 곡식과 물자를 수송하고 저장하는 방법에는 하천을 이용한 선박 이용이 선호되었다.
                  왕조 국가에서는 국가의 법전에 도로의 너비와 폭을 정해 두어 경제적 유통 및 군사적 기능성을 보장

                  하고자 했다. 도성의 도로 너비는 대중소로 구분하여 대로(大路)는 56척(尺), 중로(中路)는 16척, 소로
                                                                                 83)
                  (小路)는 11척이었다. 지방 도로에는 10리와 30리마다 이정표를 두게 했다.  지방 도로의 너비와 폭
                  은 일정한 규정이 없었으므로 물자의 유통과 운반에 한계가 있었다. 이를 타개하는 방안이 수로(水
                  路)였다.

                    오산지역은 (그림 3)에서 알 수 있듯이 유천과 토현천이 감싸고 있었으므로 하천을 이용한 경제 활
                  동이 발달했다고 보인다. 물론 오산지역은 수원과 진위를 직결하는 도로가 연결되던 지점으로 육로

                  도 발달되어 있었다. 또한 수로를 이용한 곡식의 운송[조운(漕運)]은 재해로 배가 파선되어 침몰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전복되어 익사한 자가 나오기도 하여 수로 조운을 폐기하고 육로로 수송

                                   84)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수로를 활용한 경제 유통은 지속되었다. 세종대의 오산지역은 국가
                  의 구휼정책 시행시 지방관이 타도의 미곡을 배로 운반하여 각 고을 부근에 나누어 쌓아 두었다가 운

                  반해 가도록 하였다. 또한 재해가 심한 경우 곡식만이 아니라 콩·소금·간장을 비롯하여 약재와 구
                                               85)
                  황(救荒) 작물까지 지급하게 했다.  조선전기에 흉년의 대표적인 구황작물에는 도토리[橡實]·무우
                  [菁菜]·산삼(山蔘)·도라지[桔]·메벼[粳]·메밀[木麥] 등이었다.                  86)
                    조선 전기에 국가가 농업에 치중한 것은 농경이 국가 산업의 근간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도 있었지

                  만, 보다 근본적인 배경은 농업을 근본으로 여기고 상업을 천시하는 유교적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상
                  업이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자를 높게 책정하거나 인간의 욕망 및 심성을 이용한다는 점이 유교

                  적 사고방식에 젖은 조정 관료들에게 용납되기 어려웠던 사실이 반영된 결과였다. 당시의 유자적 관
                  료들은 농사를 지으면 이윤이 적고 장사를 하면 이윤이 많으므로 백성들이 농사를 버리고 장사를 하

                  는 것은 막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수령이 민사(民事)에 힘을 쓰되,
                  요역(徭役)을 견감하고 농상(農桑)을 권면해서 백성들의 생업(生業)이 넉넉하게 된다면, 상업을 추구

                  하던 자들도 농사를 짓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다만 시장을 열게 해서 서로가 필요한 물품을 교
                  역하면 백성들에게 도움 되는 것이 많으므로 흉년에는 반드시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장




                  82) 『세종실록』 권104, 세종 26년 5월 21일(경오).
                  83) 『경국대전(經國大典)』 권6, 공전(工典), 교로(橋路).
                  84) 『세종실록』 권43, 세종 11년 1월 20일(정묘).
                  85) 『세종실록』 권108, 세종 27년 5월 12일(을유).
                  86) 『성종실록』 권34, 성종 4년 9월 5일(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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