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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최종적으로 대구로 바뀌면서 경상도에서 서울로 오가는 길은 대구-김천-추풍령-청주-천안- 191
오산-수원으로 이어지는 축선으로 이동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수원의 군사적 중요성과 더불어 수원 역사
의 지리적 중요성도 재발견된 것이다. 이에 더하여 정조때 수원별로의 확장은 영남과 호남으로 가는 / 유적
삼남대로(三南大路)의 목울대로서 수원-오산-천안을 더욱 확실한 교통의 요충지로 만들었던 것이
다. 27) · 유물
수원의 영화역을 거쳐 오산 청호역을 지나 남쪽으로 가는 까닭에 오산은 지리적 요충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오산 청호역의 오산주막은 당시 수원군의 남부면 구천동 새술막, 안녕면 간촌 대황교 주
막, 태촌면 병점 병점주막과 더불어 가장 큰 주막이었다. 조선후기 이래 “수원주막에 난 소문 전국에
서 다 안다”는 속담의 당당한 주인공이기도 했다. 이는 인근의 청호면 갈곶리 갈곶보(葛串洑)와 청호
면 역촌 청호역 부근의 운암보(雲岩洑)가 있었던 만큼 농사짓기에도 알맞은 풍요로운 땅이었다.
더욱이 1905년 경부선 철로의 개통과 서울-목포 사이의 1번 국도가 이 길을 따라 부설되었다. ‘수
원대로’의 개설과 화성건설로 수원은 경기남부의 대도회지로 확실하게 부상하였고 이러한 흐름은 오
산의 변화 발전을 함께 가져왔다. 수원은 경기도의 수부도시로 경기남부의 안성장과 오산장, 서울 송
파장으로 연결되는 용인 김량장을 아우르며 경기 남부의 지배적 상권을 갖는 대도회지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 오산장도 더욱 번성하게 되면서 1906년 오산장의 번성은 인근 양성
28)
에 사는 사람들도 오산장을 보러 올 정도였다. 3일과 8일에 개시되는 오산장(청호면 오산)은 수원
문밖장(남부면 구천동)과 문안장(북부면 보시동), 발안장(공향면 場基), 안중장(오정면 안중리)과 더
불어 수원군의 5대 장시였다. 오산장은 수원장 다음으로 큰 장으로 성장하였다.
1. 경부철도의 부설과 오산의 사회 경제적 변화
1900년 전후반 전 세계적으로 부설된 철도는 세계자본주의의 팽창과 산업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교통수단이 되었다. 이는 단지 교통운수 수단으로서의 역할 이외에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
든 면에 걸쳐 변화의 파급효과가 대단히 컸다. 철도부설과 그에 따른 지역 변화는 근대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20세기 경부철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철도 부설은 곧 한국의 자본주의화·식민지
화·산업화·도시화·근대화 등 중층적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 경부철도 부설의 주체가 일본제국주
의였고 부설 자본이 일본 자본이었기 때문에 철도 부설은 일제의 침략성과 수탈성이 내포되어 있었
다.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의 내재적인 발전을 저해하고 왜곡·억압시켰다는 점에서 커다란 아픔이었
지만 당시 철도는 한국인의 삶에 엄청난 충격과 변화를 가져왔다. 기차는 일상에 속도를 불어넣었고,
공간을 무시하게 되었다.
기차길이 열리고 역이 생기면서 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었다. 소위 역세권(驛勢圈)이
27) 한동민, 『수원을 걷는다- 근대 수원 읽기』, 수원박물관, 2012.
28) ‘誤捉誣引’,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06. 5.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