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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 재조일본인회 조직과 일본인 현황 (1909. 12월말)
인구 호당 평균
명칭 거류지 구역 호수 설립일
남 녀 계 인구
개성 거류민
개성군 개성부 336 607 478 1,085 3.23 1900. 6. 17
총대역장
시흥군내 영등포 중
영등포 거류민 총대역장 종리 하방곶리 사촌 171 297 223 520 3.04 1905. 4. 24
리 도야미리 구로리
경성 거류민단 경성 성내 일원 7,581 13,217 12,079 25,296 3.27 1906. 8. 15
인천 거류민단 인천 일원 2,917 5,916 5,209 11,125 3.81 1906. 8. 15
수원 거류민 총대역장 수원부 일원 360 692 555 1,247 3.46 1906. 8. 30
오산 일본인회 오산동 27 48 41 89 3.30 1907. 5. 6
용산 거류민단 한강 양안 2,358 3,931 3,634 7,565 3.21 1907. 9. 15
평택 거류민 총대역장 평택역 일원 38 55 57 112 2.95 1908. 5. 5
여주 일본인회 여주 및 부근 29 46 31 77 2.66 1909. 6. 23
안성 일본인회 안성 일원 43 62 51 113 2.63 1909. 10. 25
일본인 거류민조직은 1900년 경기도 개성에서 조직된 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인들이 대거 조선으로 유입되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자신감을 확보한 일본인들은 개항
장을 비롯한 대도시와 철도가 지나는 주요한 기차역에 상권을 장악하면서 거류민조직을 결성하였다.
1906년 일본인회 조직이 대거 진행되었다. 즉 서울을 비롯한 인천·부산·평양·목포·군산·진남
포 등지에서 1906년 8월 거류민단을 조직하였다. 뒤를 이어 9월 원산·마산, 11월 대구에서 거류민단
이 조직되었다.
수원의 경우에도 일본인들이 대거 모여 사는 대도시에서 거류민단이 조직되는 시기인 1906년 8월
30일 수원거류민 총대역장이 조직되었다.
1907년 5월 6일 설립된 오산일본인회는 다른 지역의 일본인회가 넓은 구역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달리 오산동으로 한정되어 조직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일본인들이 오산역을 중심으로 한 역세권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오산동 거주 일본인 거류민회는 1909년말 현재 일본인 전체 27호에 89명(남 48, 여 41)으로 평균
가구당 3.3명이 거주하였다. 오산 거주 일본인들은 대개 가족 단위로 이주한 셈이라 할 수 있다.
오산시사
1912년말 조사에 따르면 수원군의 조선인 인구는 8만5천471명(15,984호)에 일본인은 2천408명
(667호)이었다. 수원지역 일본인들은 일제강점기 내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조선에 진출한 일
제 본인들을 출신지별로 보면 야마구찌(山口), 나가사키(長崎), 후쿠오카(福岡), 사가(佐賀) 순으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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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조선과 가까운 지리적 관계 탓이 크다. 수원의 경우에도 사가현(319명), 후쿠오카현(203명),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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