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74 - 제2권
P. 374
그중 삼국시대 신라에 의해 영위되었던 유적은 중앙의 곡간부에 위치한 자연수로를 중심으로 형성
된 마을유적이다. 자연수로는 발굴조사 당시에도 물이 차오르는 것으로 보아 고대 가감이산의 곡간
부에 물이 흐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수로를 중심으로 각종 수리시설(水利施設)과 집터, 오두
막 터(高床建物址), 우물, 밭 경작지가 확인되었다.
집터는 총 23기가 확인되었는데, 주로 유적의 북·동편 능선 사면에, 일부 자연수로 서편에 위치한
다. 평면 형태는 대체로 방형 혹은 장방형이며, 일부 타원형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다. 한 변의 길이는
약 3~4m 정도이며,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집터는 Ⅰ-1호, Ⅱ-2-2호 정도로 매우 드물고 대부분
삭평과 파괴가 심하다.
집터의 내부시설로는 부뚜막과 구들, 벽공(壁孔, 벽을 지탱하는 나무기둥 구멍)과 주공(柱孔, 지붕
을 지탱하는 나무기둥 구멍), 내부 수혈 등이 있다. 그중 부뚜막은 시간에 따라 형태가 변화하는 것으
로 알려져 있다. 가수동에서 확인된 부뚜막시설은 목재를 이용하여 틀을 만들고 점토로 보강하여 양
벽을 형성한 후 상부에 넓은 돌을 얹어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
정되며, 구들은 ‘ㅡ’자형 혹은 ‘ㄱ’자형으로 비교적 길이가 짧다. 이보다 늦은 시기의 것은 생활면보다
낮게 땅을 파서 부뚜막을 만들고, 그 뒤쪽으로 ‘ㄱ’자 혹은 ‘T’자 형으로 땅을 파서 구들자리를 만든 후
상부에 넓은 돌 등으로 마감하여 조성하였다.
수리시설은 호안시설(수로의 물이 범람하거나, 수로를 형성하는 벽면이 붕괴되는 것을 예방하는
시설)과 물막이(수로 조정시설) 및 배수시설, 나무기둥열(木柱列), 저수시설, 우물 등으로 자연수로에
접하여 설치되었으며, 물의 흐름과 저수·배수 등을 관리한 것으로 추정되는 오두막시설이 수로 주
변에 분포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식수 및 관개용수를 효율적으로 관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가수동 유적은 수로를 관리하여 식수 및 관개용수로 사용한 시설이 잘 남아있었고, 사람
이 모여 살던 마을과 경작유적, 그리고 주변의 황구지천·오산천 등에서 어로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
는 그물추가 출토되었으며, 각종 생활용기와 함께 목제 도구, 농기구 등이 확인되어 고대인의 생업경
제와 일상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유적의 연대는 진흥왕이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시점
인 553년 이후에 해당하는 6세기 후반부터 삼국통일기인 7세기 후반까지 넓은 시간동안 영위된 것으
로 파악되었다.
2. 가장동 유적(佳長洞 遺蹟) ①
오산시사 가장동 382번지 일원에 위치한 오산가장일반산업단지 조성을 위해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
원에서 2003~2005년도에 실시한 발굴조사로 확인된 유적이다. 석산(해발 135.3m)의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뻗은 가지능선 상에 위치하는데, 가장 높은 지점에는 각종 구덩이가 분포하고 동쪽 및 남
제
2
권 쪽 능선에는 집터와 묘지가 산포하였다. 이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구
96기가 조사되었으며, 약 47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적에서 확인된 삼국시대 유구로는 돌방무덤(석실분, 石室墳) 1기가 있다. 남아있는 크기는 길이
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