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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검토하면서 살펴보고자 한다. 59
역사
제2절 경기도지역의 원삼국시대 양상 / 유적 · 유물
이 시대 역사의 이해를 위해 문헌자료를 파악할 필요가 있으나 이 시기의 사실(史實)을 전하는 『三
國史記』 초기기록과 중국측 사서인 『三國志』·『後漢書』간에 내용상의 괴리현상 문제가 아직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삼국지』 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 한조(韓條)에는 삼한(三韓) 소국 54개국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큰 것은 1만여 가(家), 작은 것은 수천 가였고 전자(前者)의 지배자는 ‘신지(臣智)’, 후자(後者)의 경우
는 ‘읍차(邑借)’라고 하였다. 문제는 그 가운데 수원-오산 일대는 어느 나라에 해당하는가 하는 것인
데, 이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간에 견해차이가 있다. 일찍이 이병도는 수원 일원을 모수국(牟水國)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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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비정한 후 이를 그대로 따르는 견해가 많으나 이와는 달리 천관우는 경기도 양주로 비정하였다.
이러한 삼한시대 마한 소국들의 위치비정에 있어 문헌사에서의 논거는 고지명과 현재지명과의 비
교 및 음상사(音相似) 등의 음운학적 판단으로 하고 있으나 그 신빙성에 있어서는 문제가 많다. 이처
럼 불확실한 추론에 의한 지명추정보다는 유적·유물자료를 적극 활용하여 당시 이 지역 문화의 실
상에 접근하는 것이 보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현재까지 조사된 고고학적 자
료에 기초한 이 지역 역사문화의 실체에 대해 분묘의 양상을 중심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4)
초기철기시대 말기인 기원전 108년 서북한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 당시 중국의 한제국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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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 이민족정책인 이이제이책(以夷制夷策) 이나 기미책(羈縻策) 으로 한반도의 제종족들을 통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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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그들의 세계관을 관철해 나아갔다. 이러한 정책은 여러 변화를 겪었겠지만 적어도 낙랑이 멸
망한 313년까지 당시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중국의 여러 세력들은 그러한 입장을 계속 견지
하려 했을 것이고, 한반도의 제종족들은 그에 종속되거나 혹은 저항해 가면서 상호간에 문화접변(文
化接變) 현상을 보였음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한군현 설치 이후 그 멸망시기까지의 421년 동안 한
반도의 구체적 실상이 문헌사학적으로는 물론 고고학적으로도 아직 일부밖에 파악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큰 낙차로 후진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한반도의 여러 세력들은 중국의 선
2)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그는 그 외에 화성군 남양 일대를 원양국(爰襄國), 화성군 장안·우정면 일대를 상외국(桑外
國)으로 비정하였다.
3) 千寬宇, 1979 「馬韓諸國의 位置 試論」 『東洋學』 9, 檀國大學校 東洋學硏究所. 그는 이병도와는 달리 원양국과 상외국을 파주·연천지
역으로 상정하였다.
4) 물론 취락이나 주거지도 함께 다루어야 하나 아직 자료가 부족하여 분묘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5) 고대부터 중국이 주변 이민족(異民族)을 이용하여 그 옆의 또 다른 이민족을 통제하고 부리던 정책을 말한다. 한반도의 경우 원삼국시
대에 한군현이 한반도의 동이족을 제어하기 위해 이러한 정책을 썼을 것으로 보인다.
6) 고대 이후 중국이 주변의 제종족〔北狄, 西戎, 南蠻, 東夷〕에 대해 통제·회유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중국에 조공하게 하고 관직을 수여하
면서 그에 상응한 경제적 보상을 하던 정책을 말한다. 삼한의 경우는 인수의책(印綬衣幘)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7) 權五重, 1992 『樂浪郡硏究-中國 古代邊郡에 대한 事例的 檢討-』, 一潮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