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8 - 전시가이드 2022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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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과 컨템포러리 아트


































                      동묘 정면 전경




        일월오봉도와 관우...동묘                                  많은 관심을 갖고 동관왕묘에 비석을 세우게 하기도 하였다.
                                                        특히 고종 때에는 관우의 신격화가 절정기에 다다른다. 친정을 시작하고 10
                                                        년간은 관우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1883년(고종 20) 임오군란
        글 : 박일선 (단청산수화 작가)
                                                        (壬午軍亂) 이후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관우가 신격화되는 계기
                                                        는 임오군란으로 중전 민비(閔妃)가 충주로 피신했을 때 무녀 박창렬이 환궁
        동묘(東廟, 보물 제142호)는 동관왕묘(東關王廟)를 줄여서 부르는 말로 중국     (還宮) 시기를 점치는 등 도움을 주면서 신임을 받게 되어 진령군으로 봉해지
        후한의 장수인 관우(關羽)를 모시기 위해 건립한 사당으로 서울 동대문(흥인       면서 부터이다. 그녀는 자신이 ‘관성제군의 딸’이라 자처하면서 관왕묘의 건
        지문) 밖 숭인동에 있다. 공자를 모시는 문선왕묘(文宣王廟)를 줄여 문묘(文      립을 건의하여 북관묘를 건립케 하였고 관우를 무속의 신으로 숭배하면서 신
        廟)라 부르듯이 관우를 모셔서 무묘(武廟)라고도 한다. 서울에 관왕묘는 1601    앙의 단계까지 발전시켰다.
        년(선조 28)에 세운 동관묘, 1598년(선조 31) 남대문 밖 도동에 남관묘, 1883  이후 1894년 갑오개혁과 1895년 을미개혁 등 국왕의 권력을 위협하는 사건
        년(고종 20) 명륜동에 북관묘, 1902년(광무 6)서대문 밖 천연동에 서관묘, 종  이 연이어 발생하자 불안정한 정국을 타개하고, 왕실의 안정과 왕권의 강화
        로 네거리 보신각 뒤에 중관묘 등 다섯 곳에 있었지만 일제 시대부터 철거되       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관우신앙을 활용했다. 대한제국 때에는 선조대 이후 중
        어 지금은 동관묘만 그 위치에 그대로 남아 있다 .                    단되었던 관왕묘 건립을 다시 하였고, 관왕(關王)을 관제(關帝)로 격상시켰다.
                                                        고종이 각별히 관우신앙에 관심을 보인 이유는 황제권의 강화와 함께 상무(尙
        동묘의 건립은 임진왜란 때 관우의 혼이 나타나 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사를 도      武) 정신의 함양을 위한 이념적 기반을 구축하려는 의도였다. 용맹스럽고 충
        왔다고 하여 명나라 장수 만세덕(萬世德)이 조선에 주둔하면서 군사들의 사기       직한 관우의 상징성을 이용하여 충성스러운 무신을 양성해서 대외적으로는
        진작을 위해 조선 조정에 권유하여 만든 것이다.                      밀려드는 제국주의 열강을 물리치고, 대내적으로는 모든 백성들로부터 국왕
        명나라 신종이 친필 현판과 함께 건축 자금을 지원하여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에 대한 충성심을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해인 1599년(선조 32) 조선 조정에서 ‘동관왕묘조성청’이라는 기구를 임시로
        설치하고 공사를 시작하여 1601년(선조 34) 완공하였다. 공사 도중에 신하와    동묘는 조선과 명나라가 합작하였기 때문에 양국의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유생들은 백성들이 고생한다고 건립을 반대하였고, 선조와 신하들은 동관왕         첫째, 동묘는 한중 양식을 절충한 건축 양식이다. 조선의 양식은 정전(正殿)과
        묘를 홀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쟁이 끝난 후 민심 이반을 우려한       배전(拜殿)으로 구성되어 丁자형을 이루는 것이 특징인데 동묘의 지붕은 丁자
        당시 권력을 장악한 기득권 세력이 중화사상에 입각한 사대주의적 통치 질서        와 一자가 합쳐진 工자의 형태이며 동서북쪽의 세 벽을 벽돌로 쌓은 것은 중국
        를 확고히 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을 것이다.                   식 건물의 특징을 보여 준다.
        실록에서는 광해군 때 동관왕묘의 수리를 명하고 제례를 지내게 하였다고 하        둘째, 건물의 내부 구조에도 두 나라의 양식이 섞여 있다. 관우상을 모시기 위
        나 90여년이 지난 숙종 때에 가서야 다시 등장한다. 숙종은 관우의 충절을 칭     해 정전 내부에 감실을 배치한 것과 관우에게 제향을 드리는 의식은 동일하지
        송한 시를 짓고 동관왕묘에 참배도 하였으며 1691년(숙종 17) 무안왕묘(동     만 정전 밖에 주련을 걸거나 감실 앞면에 분합문을 단 것은 조선 사당의 전통
        관왕묘)를 보수하라고 하기도 하였다. 영조도 동관왕묘에 자주 참배를 했고,       적인 형식에 따른 것이다. 반면 관우상에 옷을 입히거나 정전 앞을 면장(面帳)
        1739년(영조 15) 6월에 동관왕묘를 중수하도록 하였다. 정조 또한 관왕묘에    으로 둘러치는 것은 중국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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