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6 - 월간사진 2018년 11월호 Monthly Photography Nov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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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A-#044, 2018, Acrylic on Digital print, 50x130cm(전체), 12.5x21.5cm(개별 이미지)
왜곡, 조작, 가공, 오류 닭에 선명하지도 않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정보는 모두 가려져 있다. 비주얼을 중요시하
는 여타 사진가들과는 확실히 결이 달라 보인다. 사진 소스는 신문사에서 구입하거나, 작
색색의 아크릴로 사진 속 주인공들이 지워져 있다. 그런데 우리는 쉽게 그들의 정체를 유 가의 아카이브에서 선별한 것들이다. 이제 작가에게 찍는다는 행위는 그다지 큰 의미가
추해낼 수 있다. 박수를 치고 있는 손을 프레임 가득 확대시킨 뿌연 이미지 역시, 첫눈에 없어 보인다. 대상 또한 작업의 소재에 불과할 뿐 주된 내용은 아니다. 그럼에도 북한이
그 손의 주인을 눈치 챌 수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통용되는, 상징적 이미지 코드가 지속적으로 작업에 등장하는 이유는 그곳의 실상과 무관하게 북한의 입맛에 맞게 가공된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통해서 무수히 많은 이미지가 각 개인의 인식 속에서 이미 조 이미지와 한국에서 만들어진 북한의 왜곡된 이미지, 그 모순적 구조에 주목하고 있기 때
합되고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멋대로 이미지를 왜곡하 문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에는 정치적인 메시지나 이데올로기적인 시각이 녹
고 조작해서 머릿속에 저장하기도 한다. 이렇듯 이미지는 오류를 낳는다. 아 있지 않다. 그저 정보가 배제된 이미지를 제시하고 해석의 문을 열어놓을 뿐이다.
백승우는 바로 이 프로세스에 주목하여 ‘사진을 부정하는 사진’을 만든다. 앞서 말한 대로
이미지의 오류를 적극적으로 작업에 포함시키는 동시에, 기존에 사진 매체에 대해 가져왔 선명하지 않아 더욱 선명한
던 전통적 개념을 뒤집는다는 의미다. 사진이 발명된 이후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
지는 사진에서 기록의 속성이 가장 중요했다. 사진가의 역할은 대상을 잘 기록하고 전달 ‘지침’이라는 뜻의 <Guideline(s)>시리즈를 보면 실험적인 시도가 돋보인다. 작가는 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누구나 다 사진가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자유 시도들을 ‘사진을 훼손하는 행위’라고 표현한다. 사진 위에 아크릴 물감을 칠하거나, 손
롭게 이미지를 생산해낸다. 그렇기에 ‘대상을 찍는’ 행위 자체는 큰 힘을 지니지 못한다. 만 남기고 과감히 잘라내 정보를 숨겼다. 가려진 인물들은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사진가의 역할은 무엇일까. 백승우는 “공중에 떠다니는 수많은 이 중국의 마오쩌둥,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등이다. 일부러 기념비적인 이미
미지를 어떻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분류하고 배열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라고 지를 이용해 유추가 가능하도록 의도했다. 그런가 하면 북한에서 봤던 지도 모형을 직접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는 시대가 바뀜에 따라 사진의 개념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 만들어 촬영한 작품은 더욱 낯설다. 지도의 반짝반짝 빛나는 표식을 보고 세계 주요 도시
고 있다. 를 떠올린다면 오산이다. 알고 보면 북한과 관련된 곳들만 표시해둔 편파적인 지도다. 심
지어 영국은 아예 지도상에 없다. 가장 객관적인 지표로 쓰이는 지도조차 특정 국가의 시
사진을 의심하다 선 아래 조작되고 가공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작품이다.
사진이 단순한 기록의 의미를 벗어나 다양한 해석을 촉발할 때, 작가는 그 이미지를 ‘픽
사진을 왜곡하고 변형시켰던 이전 시리즈들 <Blow up>, <Utopia>부터 이번 신작인 처’라고 명명한다. 그의 작업 안에서 사진은 모두 기존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픽처화 되고
<Guideline(s)>까지, 일관된 관심사이자 주된 작업 내용 역시 바로 그 지점이다. 사진 매 있다. 작가가 선명하지 않은 이미지를 만든 순간, 작가의 개념은 더욱 선명해지는 느낌이
체가 지닌 한계와 오류, 또는 이미지를 가공하고 해석하면서 발생하는 모순들을 직접 이 다. 백승우가 이미지를 해석하는 방식에 집중해보면 사진 매체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정
미지에 해를 가하는 방식을 통해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17년 전 작가가 북한에 관념이 깨지는 것을 생생히 경험하게 된다.
직접 갔던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화 되었다. 한껏 기대감을 갖고 방북했지만, 찍는 장소,
대상, 결과물까지 철저한 감시에 의해 진행된 촬영에서 그는 사진이 조작되고 통제받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겪게 된다. 작가가 본 진실과 촬영한 사진은 전혀 달랐다. 사진의 객관 백승우 사진 매체에 꾸준히 질문을 던지며 이미지를 변형하고 가공하는 작업을 해왔다. 한국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런던미들섹스대학에서 순수미술과 이론 석사를 마쳤다. 현재 홍익대학교 시각
성이 무너지는 순간을 목도했고, 그때부터 사진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디자인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난 9월 <Guideline(s)> 전시를 가졌다. 2016년 국립현대미
작품을 찬찬히 바라보면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도 아닐뿐더러 일부분을 크게 확대한 까 술관 ‘올해의 작가’에 선정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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