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0 - Korus Club 28권(18년10월)_N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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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동맹전쟁 최대의 전투 투유티 전투
             _ 역사 이야기                                                                                                                  1865년에서 1870년 사이에 벌어진 삼국동맹전쟁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가 한편을 짜고서 파라과이 인구 전체의
             남미의 삼국동맹 전쟁 1865-1870년                                                                                                    78.5%, 남자 인구의 96.5%를 살해한 참혹한 인종말살 전쟁’이
                                                                                                                                       었다. 전쟁은 1864년, 브라질과 파라과이의 전투로 시작되었으
                                                                                                                                       며, 1865년에는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가 브라질을 지원하면서
             파라과이 공화국(스페인어: República del Paraguay 레푸블리카 델 파라과이, 과라니어: Têta                                                                                                                                       전쟁당시 솔라노 로페즈 대통령
                                                                                                                                       삼국 동맹 전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864년 53만명이었던
             Paraguái 테타 파라구아이, 문화어: 빠라과이)는 볼리비아와 더불어 남아메리카에 있는 내륙
                                                                                                                                       인구가 1870년에 22만명으로 줄어들었고 그중 남자의 인구는 2
             국이다. 파라과이 강이 지나며, 남쪽으로는 아르헨티나와, 동북쪽으로는 브라질과, 북서쪽으로
                                                                                                                                       만8천명에 불과했다. 남미대륙 역사상 제일 큰 규모의 전쟁이었                  세력 성장에 위협을 느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영토 확장욕
             는 볼리비아와 맞닿아있다. 남아메리카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나라라서, 때로는 "아메리카의 심
                                                                                                                                       고 세계전쟁사에서 극히 잔혹한 대량학살전 중 하나로 꼽힌다. 전                 도 분쟁을 심화시켰다. 일부 사회주의 성향의 역사학자들은 다
             장"(Corazón de América)으로 불리기도 한다.수도는 아순시온이다.
                                                                                                                                       쟁중에는 당시 브라질 국왕 동페드로 2세의 사위였던 데우 백작                  른 배경을 거론하기도 한다. 남미대륙과의 무역을 통해 실속을
             1525년 에스파냐 A.가르시아가 파라과이에 처음 발을 들인 이래로 1536년부터 식민지화를 시                                                                     이 이끄는 연합군 2만명이, 파라과이의 소년병 부대 4500명을 8               챙기던 영국이 파라과이의 국가 경영 모델을 못마땅하게 여겨
             작했다. 파라과이는 1811년 5월 14일에 에스파냐 지역 정부를 전복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시간 만에 전멸시킨 전투기록이 남아 있다. 1870년 3월1일에, 훗              뒤에서 전쟁을 사주했다는 것이다. 당시 파라과이는 지역 공동
                                                                                                                                       날 ‘프라타강의 나폴레옹’ 이라 불린 파라과이 대통령 솔라노 로페                체 생산에 기반하여 산업화 기반을 일구고 자급자족 경제를 추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와 국경을 마주대고 있는 파라과이는 정치적으로는 매우 불안하고
                                                                                                                                       즈가 브라질과의 교전중 전사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파라과이가                   구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국내 제조산업이 거의 없다시피한 불모지대인 가난한 나라이다. 그러나 파라과이                                                                         전쟁의 혼란과 극심한 성비 불균형을 극복하는 데에는 수십년이
             는 19세기 초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먼저 공화국 정부를 세웠으며 당시에 아르헨티나보다도 부유                                                                                                                           전쟁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의 의견이 존재한
                                                                                                                                       걸렸다.
             했다. 독립적인 경제를 굴려가고 있던 파라과이가 오늘날 후진국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다. 전통적인 관점은 파라과이의 대통령이었던 프란시스코 솔
             130년 전에 일어났던 파라과이 전쟁의 상처가 워낙 컸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역사가들이 많다.                                                                      요즘 이 4개 나라는 메르코술(남미자유무역지대)의 회원국으로                   라노 로페스의 라플라타 강 유역의 문제에 대한 과격한 정책 때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한 세기 전에 그토록 치열하게 싸운 데는                 문이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파라과이의 전통적 관점과 1960년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무엇보다 국경선인 프라타강 유역에 대                 대 이후 아르헨티나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의 관점은 대영 제국의
                                                                                                                                       한 지배권을 둘러싼 갈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게다가 파라과이의                  이해관계를 더 우세한 이유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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