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 - Choi wungsub Success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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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이
만난
이슬람 국가
도로마다 쓰레기가 넘쳐나고, 차도 사람도 무질서의 극을 보여주고 있었다. 서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아파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은 닭장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사각형 건물마다 작은
창문들이 겨우 숨을 내쉬는 숨구멍처럼 붙어 있는 듯 보였으며, 또한 건물마다 바람에 펄럭이는
빨래가 어릴 적 못살던 한국의 정경을 연상시키며 마음을 묘하게 만들었다. 13 년 전
아제르바이잔은 그렇게 다가왔다.
내가 아제르바이잔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9 년 바울선교회에서 선교훈련을 받으면서다.
선교훈련 동안 한 나라를 지정 받게 되는데, 그곳이 아제르바이잔이었다. 선교지로 실제 떠나기
전, 필리핀 훈련센터 MOC 에서 먼저 정탐을 위해 아제르바이잔으로 떠난 적이 있다.
‘내가 가게 될 그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종교와 문화를 가지고 살고 있을까?’ 정탐을 떠나기
전 비자를 받기 위해 필리핀에서 다시 한국으로 귀국해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내가 가야 할
나라, 사역을 위해 들어가고자 눈물로 기도했던 나라,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이
솟구쳤다. 더불어 긴장감과 불안감 또한 온몸에 전류처럼 흘렀다.
며칠 후 비자를 받고 모스크바를 거쳐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인 바쿠로 들어가는 경로를 택해
출발했다. 모스크바까지는 홍콩을 경유하기로 했다. 그래야 비행기 요금을 낮출 수 있다는 본부의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지에 가기 위해 다시 선교훈련을 받는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말해서
비행기 요금을 더 내라고 하든지, 아니면 사전에 말을 해주든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당시 바울선교회 행정 간사의 결정이었던 것 같다. 정탐 떠나는 사람을 마닐라, 서울,
홍콩, 모스크바, 바쿠를 경유하게 하는 친절한(?) 바울아줌마 덕분에 엄청난 고생을 한 뒤에야
기도응답의 도시, 바쿠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쿠에 도착해서는 현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 집에서 묵게 되었다. 선교사는 내가 도착하자마자
탁구를 치러 나가자고 할 정도로 활력 넘치는 분이었다. 열흘 동안 그곳에 머물며, 바쿠의 이곳
저곳을 돌아본 후에 Y 단체에서 운영하는 언어학원을 둘러보게 되었다. 선교사로 정식 파송된다면,
언어연수와 비자문제를 그 학원에서 한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선교사의 조언에 ‘이거다!’ 싶었다.
현지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감사, 또 감사하며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이제 한국에 들어가
파송을 받고 현지에 들어갈 준비만 하면 되는 수순이었다. 그렇게 2000 년에 파송을 받고
기다리는데, 예상 외로 비자가 빨리 나왔다. 파송이 결정된 지 두 달 만에 입국하게 된 것이다.
잘 훈련된 용사가 주님 주신 새 땅으로 출정하는 심정으로, 아제르바이잔에서 무엇인가를 해내야
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떠났다. 그날이 2000 년 2 월 10 일이었고, 정착하고자
준비해간 전 재산 6 천 달러를 수중에 품고 있었다.
“무엇을 하려고 왔나요?”
대답을 하기도 전에 또 질문이 날아든다.
“베트남? 몽골?”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입니까?”
“아, 일본 사람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