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28 - 일산교회 60주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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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고양지역을 방문하여 전도하는 과정에서 설립한 행주교회(장로 킬 수 있고 교인들도 인입(引入)시킬 수 있다는 원리가 맹위를 떨치게
회)다. 그 뒤 능곡 출신 교인들의 주도로 사산교회가 설립되고, 얼마 된 것이다.
제 뒤 능곡교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능곡교회는 일제 치하에서 교육운동 이런 분위기는 특히 신도시로 이주해 오는 교인들의 심리, 즉 젊은
4 과 민족운동을 선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대의 신앙생활 양식과 큰 틀에서 맥을 같이 한다. 새로운 진입자,
장
일
산 1960년대는 교파간의 연합운동과 다양한 사회사업 활동에 힘입어 새로운 세대는 임대교회나 개척교회에 나가 봉사하는 것을 부담스럽
시 대 고양시 지역의 기독교 교세도 크게 커졌다. 교회수가 1960년 22개에서 게 여기고, 교회 건립 등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려 한다.
1970년에 49개로 두 배 이상 증가하였다. 1970년대는 ‘빌리 그래함 전 우리 교회는 외형상 둘째 유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상
도대회’ 등의 대형집회로 상징되는 ‘대전도 운동’으로 고양시의 신도수 세 번째 유형이나 마찬가지였다. 널리 알려진 교회도 아니고, 기성 교
도 크게 늘어나 1980년 말까지 교회수는 91개로 증가하였다. 1980년 인들의 숫자도 100여 명 남짓하였을 뿐이다. 재정도 빈약한 축에 속
고양군 인구 15만5천 명 가운데 기독교인은 13.8%에 이르렀다. 하였다.
1990년대 신도시 건설은 고양시 지역의 기독교 발전에 중요한 전 이런 상황에서 우리 교회의 전교인은 사실상 개척교회 마인드로 전
환점이 되었다. 아파트 건립과 동시에 수많은 교회들이 새로 세워졌 도를 시작해야만 했다.
다. 그 유형은 첫째는 서울의 기성 교회들이 교회의 건립과 운영을 지
원하는 유형이다. 일산 명성교회, 일산 충신교회, 일산 광성교회 등이
여기에 들어간다. 이들 교회에는 안정적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려 2. 일산교회의 건축
는 이들이 인입되어 급속히 성장하였다.
둘째는 서울의 교회가 일산으로 이주하는 유형이다. 서울에서 이 가. 건축공사 시작
주해온 교회들이 곳곳에 새로이 예배당을 세웠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고민에 부닥치게 된다. 새로 일산지구로 이주해온 사람들 가 1) 부지매입
운데 교인으로 등록하는 비율이 점차 낮아지는 것이다.
셋째는 순수한 의미의 개척교회이다. 무연고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 1989년에 교회 신축을 결정한 뒤 곧바로 건축위원회가 구성되었
한 경우로 지역교회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안정적 기반을 가 다. 원래 건축위원회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노량진 주변에 적합한 예
진 대형 교회들 틈에서 이들 교회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기 일쑤다. 교 배당 터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회의 부침이 매우 심해진 것이다. 당시 최정근 건축위원장을 비롯한 위원들은 노량진 주변에서 마땅
한 예배당 터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매물로 나온 땅들을 보러 다
서로 조금씩 다른 배경을 가진 교회들이 급속하게 진입하면서 개별 녔다. 1990년 3월엔 사육신묘 인근 노들유치원 자리가 6억6천만원
교회끼리의 과당경쟁이 벌어졌다. 대형교회들의 버스 운행과 지나친 (200평×300만원)에 나왔다. 교통은 좋지만 저지대라서 배수관계가
홍보활동, 전도용 선물 돌리기 등의 물량주의적 전도방법에 따라 작 염려된다고 하여 포기하였다. 그해 7월엔 신길동 지역과 숭실대 뒤편
은 교회들은 점점 더 크게 흔들리고 위축돼 갔다. 고양시의 신도시 개 에 있는 상도동 지역, 그리고 다른 노량진 지역을 찾아가 적합성을 살
발과 교회의 성장과정은 신도시만의 독특한 교회 생태계를 탄생시켰 펴보았지만 역시 그다지 마땅치가 않았다. 11월17일에는 장로회와
다. 자본주의적 원리에 입각해 ‘안정적 기반’을 갖춰야 교회를 성장시 건축위원회가 연석회의를 열어 ‘봉천1동 480평 대지’를 구입하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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