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5 - 일산교회 60주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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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예
부였고,
재미있게
학생들과
점은
있습니다.
아쉬웠던
남아
3. 일산교회는 친정 같은 곳입니다. 부였고, 학생들과 재미있게 사역을 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아쉬웠던 점은 예
3. 일산교회는 친정 같은 곳입니다.
했던
사역을
권사님들
모시는
아버님처럼
그리
모시는
그렇기도
어머님처럼
장로님들과
그렇기도 한 것이 아버님처럼 모시는 장로님들과 어머님처럼 모시는 권사님들 그리 은이가 뇌성마비로 판정을 받아서, 다시금 미국으로 들어가야 했던 점입니다. 개인
것이
한
은이가 뇌성마비로 판정을 받아서, 다시금 미국으로 들어가야 했던 점입니다. 개인
교회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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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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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니
적으로 예은이가 뇌성마비라는 것을 알고서,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1년 정도 걸렸습
고
집사님들이
그런
남자이지만
누나같은
친정
제 고 형 누나같은 집사님들이 계시니 친정 같은 교회이기도 합니다. 남자이지만 그런 적으로 예은이가 뇌성마비라는 것을 알고서,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1년 정도 걸렸습
4 생각입니다... 때로는 “목사님 그렇게 하시면 안 돼요!”라고 따끔하게 야단도 치시 니다. 그 힘든 시기에 같이 아파해주고 위로해 주었던 분들은 교회 구역식구들이었습
니다. 그 힘든 시기에 같이 아파해주고 위로해 주었던 분들은 교회 구역식구들이었습
생각입니다... 때로는 “목사님 그렇게 하시면 안 돼요!”라고 따끔하게 야단도 치시
장
산 고요. 나는 섭섭하기보다 그런 믿음에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이 있다는 것이 니다. 특히 김정열 권사님과 박갑진 권사님의 사랑은 지금도 가슴깊이 새기고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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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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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갑진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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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열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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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도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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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있다는
형제들이
아버지
고요.
섭섭하기보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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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 두 권사님이 많이 그립습니다.
너무나도 좋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 분들의 사랑과 도움 그리고 정감이 오늘
시 대 너무나도 좋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 분들의 사랑과 도움 그리고 정감이 오늘 니다. 그 두 권사님이 많이 그립습니다.
나를 있게 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있게 했기 때문입니다.
일산교회와의 두 번째 만남은 미국에 다시 들어갔다가 1997년에 한국으로 다시
일산교회와의 두 번째 만남은 미국에 다시 들어갔다가 1997년에 한국으로 다시
나와 사역자로 합류한 시기였습니다. 당시에 교회는 노량진에서 일산으로 이전했지
일산교회 목사님과 장로님 그리고 권사님 집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나와 사역자로 합류한 시기였습니다. 당시에 교회는 노량진에서 일산으로 이전했지
일산교회 목사님과 장로님 그리고 권사님 집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만, 완공이 되지 않아서 지금의 본당 완공을 위해서 주일에 예배를 마치고나서 교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일산교회 위에 넘치기를 간절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만, 완공이 되지 않아서 지금의 본당 완공을 위해서 주일에 예배를 마치고나서 교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일산교회 위에 넘치기를 간절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인들과 함께 벽돌 등을 날랐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드립니다! 인들과 함께 벽돌 등을 날랐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드립니다!
그 당시에 맡았던 사역은 지역사회 전도와 섬김의 일환으로 시작된 문화원 사
그 당시에 맡았던 사역은 지역사회 전도와 섬김의 일환으로 시작된 문화원 사
역이었습니다. 영어, 일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지고서 지역사회를 섬겼는데, 저
역이었습니다. 영어, 일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지고서 지역사회를 섬겼는데, 저
심상길 목사 는 미국유학파라고 영어회화 프로그램을 담당했었습니다. 그 덕분에 일산교회 교인
교인
일산교회
프로그램을
덕분에
담당했었습니다.
미국유학파라고
그
는
영어회화
들 말고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들 말고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심상길 목사는 노량진시대부터 일산시대에 이르기까지 교육전도자
세 번째 일산교회 시절은 2017년에 대학이 엄혹했던 시절에 교수직에서 해임되
와 협동목사로 우리 교회에 3회에 걸쳐 부교역자로 사역을 하였다. 학생 세 번째 일산교회 시절은 2017년에 대학이 엄혹했던 시절에 교수직에서 해임되
면서 대학과 협동목회자로 섬겼던 대학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던 시절에 다시금 일
회 담당 전도자로, 문화원 사역 강사로, 예배 설교자로 많은 수고와 업적 면서 대학과 협동목회자로 섬겼던 대학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던 시절에 다시금 일
산교회에서 손을 내밀고 품어주었던 시기입니다.
을 남겼다. 심 목사는 조중란 사모와 무남독녀 예은 양을 두고 있다. 산교회에서 손을 내밀고 품어주었던 시기입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보면
번에
걸친
시절을
힘들었던
일산교회
세
생각해
시기에
심상길 목사 ‘어머니의 품’같은 일산교회 이렇게 세 번에 걸친 일산교회 시절을 생각해 보면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에
저와 저의 가정을 품어주면서, 사랑을 많이 주었던 일산교회라는 생각을 갖게 됩
저와 저의 가정을 품어주면서, 사랑을 많이 주었던 일산교회라는 생각을 갖게 됩
개인적으로
번의
만남이
다른
저는 개인적으로 일산교회와의 만남이 다른 목회자들과 다르게 세 번의 다른 시 니다. 한 마디로 일산교회는 ‘어머니 품’같은 교회입니다. 아무리 연약하고, 부족해도
저는
세
다르게
시
일산교회와의
다른
목회자들과
니다. 한 마디로 일산교회는 ‘어머니 품’같은 교회입니다. 아무리 연약하고, 부족해도
기에 걸쳐서 있었습니다. 아마도 일산교회 60년의 역사에서 일산교회를 거쳐 간 목 언제나 품어주는 따스함이 있는 어머니 품으로서의 일산교회입니다.
기에 걸쳐서 있었습니다. 아마도 일산교회 60년의 역사에서 일산교회를 거쳐 간 목
언제나 품어주는 따스함이 있는 어머니 품으로서의 일산교회입니다.
이런
독특한
사역경험을
것입니다.
드물
가운데
목회자는
회자들
이런
회자들 가운데 이런 경험을 가진 목회자는 드물 것입니다. 이런 독특한 사역경험을
경험을
가진
갖게 된 것은 저의 개인적인 상황 때문이기도 하였지만요.
갖게 된 것은 저의 개인적인 상황 때문이기도 하였지만요. 그 일산교회가 60년의 역사가 되었네요. 축하드리고요. 60주년을 맞는 장성한 교
되었네요.
역사가
교
60주년을
축하드리고요.
일산교회가
그
맞는
60년의
장성한
회로서, 일산지역만이 아니라, 한국 그리스도의교회의 역사에서 큰 역할을 감당하는
회로서, 일산지역만이 아니라, 한국 그리스도의교회의 역사에서 큰 역할을 감당하는
만남은
일산교회가
노량진
번째
일산교회와의 첫 번째 만남은 일산교회가 노량진 시절인 1992년 말이었습니다.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일산교회와의
첫
시절인
1992년
말이었습니다.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딩신학대학원에서
미국 하딩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과정을 마치고, 4년에 걸친 유학생 시절이 너무
미국
너무
시절이
4년에
걸친
마치고,
목회학석사과정을
유학생
힘들어서, 잠시 한국에 나와서 재충전을 하자고, 유학시절에 미숙아로 태어난 예은
힘들어서, 잠시 한국에 나와서 재충전을 하자고, 유학시절에 미숙아로 태어난 예은
이를 데리고 한국에 나왔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에 교회에서 담당했던 사역은 학생
이를 데리고 한국에 나왔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에 교회에서 담당했던 사역은 학생
304ㅣ1962-2022 일산그리스도의교회 60년사 은혜의 60년을 넘어 새시대로ㅣ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