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 - 하영준 展 2023. 6. 7 – 6. 13 갤러리라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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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龍松 Ⅳ 34x27cm 화선지에 수묵
것이다. 아울러 자연생명체의 어느 한 순간, 찰나를 건져 올린
다. 시간의 속박을 벗어난 생명체는 홀연 자신의 진상(眞相)을
밝힌다. 아울러 작가는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를 빌어 이를
크게 그린다. 그 안에 우주자연의 신비한 이치나 현상이 내재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꽃 한 송이나 대나무 잎 새 하나를 빌
어 상상하는 세계는 무한하다. 저 사물의 핵심으로 밀고 들어가
만난 것, 대자연의 원초적 생명의 힘과 교감해서 얻은 것을 형
상화하려 한다. 그러니 작가는 마음의 순수함의 경지에 이르러
자연과 합치됨을 느꼈을 때 일어나는 심리적 반응을 중시하고
내면에서 우러난 맑은 감성적 심사를 우선한다. 궁극적으로 추
구하는 것은 자연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정신적 흐름
인데 이는 자기의 뜻을 자연물에 의탁하는 문인화적 전통의 연
장선상에 있다. 또한 형태와 닮음을 구하기보다는 생동하는 기
운을 찾고자 한다. 만물은 영기의 화신이므로, 만물이 영기를
발산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전적으
로 화가의 몫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먹의 운용과 필법/골법을 중시한다. 아울러 동양화의 수묵화를 이루는 재료들, 매재적
속성을 최대한 순리에 따라 화면 위에 얹혀놓았다. 자연에 따른다는 것은 순리와 이치에 따르는 것이다. 동양화는 침윤하기 쉬운 먹
과 색을 부드러운 모필에 먹여서 침윤하기 좋은 종이 위에다 그리는 것이므로 지극히 우연적인 수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위로, 작위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우연히 가져오는 기법을 필연으로 이용해서 그리는 게 동양화 수법의 전통이다. 그림 역시 인위
적이며 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무위적인 것이다.
작가는 화선지에 그림을 그린다. 글을 쓴다. 화선지는 무엇보다도 그 흡수성 때문에 평면에서도 깊이와 부피를 포용하는 신축성 있
는 재료이다. 먹이 번진 화선지는 2차원도 3차원도 아닌 이를테면 소수 차원의 프랙탈(fractal) 공간이며 생성하고 변화하는 차원을
보여준다. 그 공간으로 먹이 스미고 번진다. 먹그림이란 결국 물의 흔적, 자취, 경로, 흐름 등을 보여주는 것이다. 수묵은 필법에 묵법
으로, 궁극적으로는 수법(물의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다. 화면에는 온통 먹이 번지고 스며든 흔적이 가득하고 그 위로 날카로운 몇
번의 붓질이 얹혀 진다. 먹이 얹혀 진 화면과 여백 사이에서, 구상과 추상 사이, 선과 도상 사이에서 붓질은 진동한다. 붓질, 붓의 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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