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4 - 샘가 2025. 11-12
P. 164
그 자리
김필곤(열린교회 담임 목사, 기독시인)
어두운 땅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말없이 뿌리를 내리고
사나운 비바람에도
한치 흔들림 없이
제 몸을 곧게 세웁니다.
차가운 겨울 한낮
지나는 길손에게
따뜻한 가림막 되지 못하지만
작은 새 한 마리가
잠시 쉬어 가도록
기꺼이 어깨를 빌려줍니다.
온 힘을 다해 키운 떨어진 잎사귀는
탐스러운 열매마저 썩어 거름이 되어
누구든 따가게 하고 발밑의 흙을 살찌우고
계절의 끝자락엔 나무는
화려했던 모든 잎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미련 없이 비워냅니다. 그저 제 자리를 지키지만
언제나
그 넉넉한 품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자라납니다.
16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