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6 - 종사총람 수정증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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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역대우리족보상고(歷代族譜詳考)






                우리  족보에는「三陟君」得貫祖에  대하여「一善君」으로  기재하고  있으니  이것이  문
              제의 오류(誤謬)라는 것이다.

                一七九五년  乙卯大同譜의  처음  편찬은  청장보와  安東의  宗門에서  자문(諮問)을  받아
              간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청장보나 몇 가승보(家承譜)엔 錘 公이 一善君으로 되었

              으니,  一善은  지금의 善山의  옛  지명이기에  처음  족보를  주관하신  先人들은  錘  公은  貫
              鄉과는 무관(無關)하다 하여 始祖반열(班烈)에서 고증 없이 배제(排除)했다고 본다.

                그런데  一八四九년  乙酉대동보부터  甲戌·甲辰·辛酉보에는  金氏同源錄에  의한「신라
              김씨  九公子  兄弟後分封序次」를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는「王第八子錘封三陟金氏」라
              고 分明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錘  公의  旁註에  一八七四년  甲戌보에는「三陟君  구보(舊譜)云一善君」으로  一
              九〇四년  甲辰보에는「三陟君  一云  一善君」으로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애매모호하고  所
              信없는 기록을 보게 되는데 이는 先人들께서 매우 고민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一八七四년  甲戌보  부터는  새로  추가된  旁註를  보는데  곧「隱逸義士不屈於
              麗」라고  한  것이다.  錘  公은  고려  王建太祖의  外孫으로  고려조로부터  시혜(施惠)를  받
              는 身分인데 이와 같은 방주는 事理에 맞지도 않거니와 不適切한 표기라 하겠으며, 이와

              같은 一連의 일은 渭翁悉直郡王을 分派祖로 모신데 대한 相値되는 것을 억제하고 合理化
              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 할 수 밖에 없다.

                或者는  錘  公께서「三陟君」으로  封君되셨는데  俗説에  의한  襲封이니  또는  改封되셨
              다 함은 正説일수 없고, 結果的으로는 父子간에 遷位되었다고는 하나 이는 다만 초기 족
              보를 집필하신 先人들의 充分한 考證의 不察에서 비롯된 誤謬라고 생각한다.


                錘  公께서「三陟君」의  封君으로 得貫되심을  文獻으로  認知한  연후에도  당시로서는  先祖
              께서 이미 추대한 바를 再論하여 改正하기란 윤리 도덕상 용납되지 않았으리라 이해한다.

                一九二一년  辛酉보  序文을  쓰신  麒滎(通政大夫中樞院議官)  先祖께서는  序文에  言及하
              시기를「아무리  先人들이  한  일일지라도  오늘의  考證文獻이  밝혀져서  새로운  사실이  드
              러나면 수정 보완해야한다」라고 指針이 되는 敎訓을 주셨다.

                이  교훈은  今番  우리들이  考證에  의하여  得貫하신  錘할아버지를  始祖로  모시고  아드
              님은 追贈되신 바 悉直郡王의 位에 바로 모시게 된 勇斷을 주셨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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