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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일보                                                                                             기획                                                                        2020년 9월 2일 수요일                 7







         조선 최초 여성도공 백파선 흔적을 찾아서!                                                             타 상공회의소. 아리타 백파선갤러리와 교류                   본 땅에 정착하기까지의 이야기는, 슬프고도  간 사기장들의 심정을 잘 표현한 글이었다.
                                                                                             를 하며 연구를 하고 매년 열리는 김해분청
                                                                                                                                                                                 그들은  그렇게  살며  고향을  그리워하며  일
                                                                                                                                       가슴이 저려왔다. 이 요장에서 각종 도자기
                                                                                             도자기축제에서도 “김해 원류 사기장 김태                    에  그려  넣은  철새문양은  조선에서  건너와  본 땅에서 살다갔다.
         백파선(白婆仙) -1                                                                         도.백파선  추모제를  열고  있다.  조선시대는  다시는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계                           임진왜란은  “도자기의  전쟁”이라고도  불
                                                                                             유교이념이  뿌리내리며  기록의  나라  불리
                                                                                                                                       절 따라 왔다가 조선을 향해 날아가는 철새
                                                                                                                                                                                 린다. 수십 년 전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지만  사·농·공·상  제도가  뿌리  깊게  내               가  부러워  살아생전  고향땅에  가보고  싶은  400년  전의  하이테크  도자기전쟁에서  조선
          불의 여신 정이로 알려진 (MBC 드                     도(深海宗傳)는  1618년10월29일  61세  나이            려 공업과 상업을 멸시하던 풍토 속에 조선  소망을 그려 넣은 것 이라했다. 또한 선조들                                   은  세계에서  2위인  도자기기술의  중요성을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실록과 양반가의  이  죽기  전에  유언으로  따뜻한  남쪽방향이  몰라  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한  반면  일본은
          라마)  백파선  사기장이  현시대  대한                  로 사망하였다. 이로써 남편이 떠난 그곳에                   기록 등은 각 가문에 남아 유물로 전해졌다.  아닌  죽어서라도  고향으로  가고  싶은  마음                               조선에서 피랍 하여간 조선사기장들의 기술
          민국에 사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                        서  백파선은  자기들의  식구와  도자기를  생               그러나 하층계급으로 내려가면 기록들이 거                    에  고향이  있는  북쪽방향으로  묻어  달라는  을  향상시키고  발전을  거듭한  끝에  명나라
                                                   산하던  식구들을  보살피며  살다가  70세  나
                                                   이에  960명의  식솔들을  데리고  도석(陶石)              의 남아 있지 않아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                   유언에 따라 북쪽에 묘 자리를 쓰는 전통이  가  망하면서  생긴  간극을  이용하여  유럽에
          김해(金海)는 고대로부터 역사적 유서가 깊                  이  많이  나는  아리타(有田)로  이주하였다.               기가 대부분이다.                                 이어졌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살았던 선조사                   도자기수출을 극대화 시키며 경제부흥을 맞
          은 지역으로 이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여                  아리타에서 활발한 도자기생산 활동을 하다                    특히, 사기장의 생활상과 도자기 만드는 재                   기장들의 생활상을 가감 없이 이야기하였고,  이한다. 이러한 일본의 경제부흥은 임진왜란
          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그 중 자기생산과 관                 가 1656년 3월 10일 96세에 세상을 떠났다               료와  공정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특히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직접 긴 시간                               이후 300여년이 지난 뒤 일본제국이 대한제
          련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                   고 한다. 백파선이 죽은 후 증손자 후카우미                  않다.  오히려  조선사기장의  기록을  보려면  을  내어  자기가문의  도자기  작업장과  멀리  국의  국권을  피탈하는  경술국치(庚戌國恥)
          志)』 에, ‘김해도호부(金海都頀府)의 동쪽                 무네노리가  아리타의  호온지(報恩寺)에  만                 일본으로 끌려간, 초기의 조선사기장들이 고                   떨어진  선생의  개인  도자기  작업장을  보여  를 당하게 된다. 지금 우리나라는 8.15광복
          에 하품을 생산하던 감물야촌(甘勿也村)에 1                 료묘태도파지비(萬了妙泰道波之碑)를  세우                    향을  그리워하며  기록한  묘비와  후손들의  주는  등  한국에  대한  각별한  정을  가지고  과 6.25전쟁을 거치며 경제규모가 명목기준
          개의 자기소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 ”할머니는 고려(조선) 심해(深海) 사람                  이야기에서 생활상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있었다.  또한  큐슈  오지마을  오이타현    히                              세계9위의 나라가 되었다.
          현재 감물야촌의 실체를 상동면(上同面) 일                  이었다 “라고 비문에 적었다.                          가고시마  심수관요(沈壽官窯)에  방문한  적                 타시  온다도자기(小鹿田燒)  마을에서도  조                 물질적으로는 반도체와 휴대폰과 조선 산업
          원에서  문화재  정밀지표조사  및  발굴조사                *백파선(白婆仙)-본명은 정확히 알려진 게                   이 있다. 당시 방문객이 한국인이면, 선조의  선사기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18년                                  등 여러 가지로 세계를 선도하고 있고 세계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여기서,  상동(上            없으며 백파선이라는 이름은 훗날 온화한                     나라에서 찾아왔다고 심수관요 갤러리 입장                    의 세월동안 큐슈를 중심으로 조선사기장의  문화시장에  K-POP을  중심으로  한류를  전
          同)이라는 명칭은 김해부의 동쪽에 있는 면                  얼굴에 사람들을 편하게 감싸주는 덕을 지                    료를  무료로  하는  등  한국과의  끈을  놓지  흔적을 찾아 나서는 동안 여러 번의 아리타  파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백파선이 우리
          이란 뜻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이곳 상동                  녔고 백발이 성성하고 성스러운 느낌을 준                    않으려 하였다. 아마도 그것은 자손 대대로  방문을  통하여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선                                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가  이  땅에  가지고
          일원(묵방리. 대감리)에서 조선 전기-후기에                 다 하여 효심이 깊은 손자가 붙힌 이름이라                   내려오며 그리운 고향땅으로 돌아가기를 소                    조사기장인 이삼평과 김태도, 백파선의 기구                   있는 문명과 인적 물적 자원을 소중히 여기
          해당하는 자기가마터가 확인되었다.                       고 전해지고 있다.                                원하며  한이  담긴  이야기를  자손들에게  물               한 운명을 알게 되면서 국력의 중요성을 알                   며  기술과  문화를  발전시키는  일이  또다시
          그동안  김해읍성·김해  구산동유적·  김해                 *심해(深海)-고향 김해를 마음깊이 생각한                   려준 결과 후손들의 머릿속 뇌리에 깊게 인                   았다.                                       제2의 백파선을 만들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
          가야의  숲  조성부지유적  등에서  ‘김해(金               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설과 김해에서 깊                   식되었던 것 같다.                                조선  최초  여성  사기장  백파선.  일본  아리             해본다.
          海)’라는  명문이  새겨진  분청사기인화문                 은바다를 건너 왔다는 설이 있다.                        도자기의  고장  큐슈(九州)  사가현에  있는  타도자기의 어머니로 불리는 백파선을 일본
          발·접시 등이 다량 출토되었지만, 그 유물                                                                  이마리(伊萬里)  오카와치야마(大川內山)마             아리타에서 만날 때면 조선 땅에서 온 식솔                   참고자료
          을 생산·제작한 가마터가 확인되지 않았다.                                                            을은  조선사기장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유                 들을  거두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어려운  삶               1.김해분청도자박물관 자료
            최근  들어  김해시  상동면  일대에서  진행             백파선(白婆仙) -2                               출을  막기  위하여  통제가  쉬운  깊은  산골              을 개척해간 백파선! 백파선과 남편 김태도                   2.한.일 백파선 국제학술포럼0608
          된 몇 차례의 문화재조사를 통해 ‘김해(金                  일본 전역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                    에 도자기마을 조성하였다. 외부인 출입 또                   를 주제로 쓴 소설 인 무라다 키요코(村田                   3.무라다 키요코(백년가약)-講談社2004
          海)’가  새겨진  분청사기유물과  한글이  새               하여 수많은 조선백성들이 일본으로 끌려갔                    한 철저히 차단하여 200여 년간 지속되었다.  喜代子)의  <백년가약(百年佳約)>(講談社,  4.김해 상동 자기 가마터-정밀지표조사
          겨진  철화  백자편  등이  확인되어  김해도자              다.  특히  후쿠오카지방의  다케오·카라츠·                 매년 이곳을 갈 때면 이마리 입구에 위치한  2004) 내용의 한 문구가 생각난다.                                        2차학술자문위원회자료집
          기의  생산지를  밝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              이마리·아리타지역과 큐슈 남쪽 끝 가고시                    도공들의 묘지를 보며 나라가 힘이 없어 이                   "한 달에 한번 산에 오르는 날이다. 일본에
          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임진왜란(1592~98)  마까지  수많은  조선의  사기장이  끌려갔다.  곳까지 끌려와 감옥 같은 깊은 산골에서 거                                             건너온 고향 사람들이 모두 나와 근처의 고
          전후 김해지역에서 도자기생산이 활발히 이                   그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새로운  땅에  정               칠고  힘든  여정을  견디며  살다간  조선사기               려  산에  올라  고국을  그리며  노래와  춤을
          루어지고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착하기까지는 끊임없는 핍박과 고통을 당하                    장들의  영혼에  기도하였다.  일본의  도자기  추고 저녁까지 실컷 노는 것이다. 꽃이 없는                                                     박용수
          김해에서 도자기를 제작하던 사기장 김태도                   며  인내라는  단어를  되새기며  살아가야  했               산지인 사가현 카라츠(唐津)의 경우, 조선사                  꽃놀이지만  고향  동지들에게  꽃은  필요  없
          (金泰道)와 아내였던 백파선(일본에서 지어                  을 것이다.                                    기장들의 후손들이 도자기를 업(業으)로 일                   다. 고국과 이어지는 하늘만 있으면 되는 것                                       김해도예협회 이사장
          진  이름)이  1592년.  조선을  침략한  다케오           도자기 작업을 위하여 조선 땅과 다른 토질                   가를 이루고 있다. 카라츠에서 여러 요장을  이다.
          (武雄)의  영주였던  고토  이에노부(後藤家                (土質)을  가지고  있는  지형적  환경을  극복              다니다 우연히 아야요(窯)를 방문했다. 조선                  아이고  우리의  고향이여,  아이고  아름다운
          信)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갔다. 당시 일본도  하고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을 찾아다니                                  사기장의 후손이라고 밝히며 반갑게 맞이해                    산천초목이여, 아이고 훌륭한 우리들의 조상
          침략전쟁의  후유증으로  일본국내사정이  좋                 며 수많은 실험과 생산을 통하여 좌절과 희                   주신  나가자토  노리모토(中里紀元).  나가자                이여! 이 몸은 이국의 흙이 되리라. 아이고
          지  못하여  끌려간  조선인  사기장의  생활이  망을  품고  살았던  조선사기장들의  흔적을  토 후미코(中里文子)부부를 만나 환담이 이                                              당신을  그리는  마음은  언제까지나  변함이
          넉넉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 속                  찾아 2002년부터 매년 일본 전역을 다녔다.  어졌다. 그 이후에도 세차례의 방문을 통해  없어라."
          에서도 23~4년 버티던 백파선의 남편 김태                 그  후  (사)김해도예협회에서도  매년  아리                들은 나가자토 노리모토선생의 선조들이 일                    비록 소설속의 이야기이지만 일본으로 건너






























                                        백파선 묘비 참배중인(사)김해문예협회회원들                                                                         카리츠 아야요 뒤편 200년된 조선식 가마 (나가자토노리모토 선생)




































                                                                 백파선 묘비가 있는절(아리타보은사)                                            아리타 백파선 한글 묘비                                        카리츠 아야요 철새 문양






























                                                                                                                                                              카리츠 아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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