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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20년 11월 4일 수요일                                                                            책과 이야기





                                                                                                                                                                                                                                                                                                                           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경남정신의 뿌리-



              남명 선비문화를 찾아서



                                                                                                                                                                                          김종간  향토사학자

                                                                                                                   이어서>>>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                                                김종간의 미친 소리 스물 다섯 번째


                                                                                                                   작가 정현석은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진주목사(晉州牧
                                                                                                                   使)에서 1870년 6월 8일 김해부사(金海府使)로 부임해                               연자루(誌子樓) - 정숙조鄭翻朝
                                                                                                                   많은 일을 하였다. 무너져 내린 분산성을 다시 쌓기도
                                                                                                                                                                                    才合老林園 소재단합노림원
                                                                                                                   하였는데  위의  시에  갑옷을  입고  있었으니  왜구에  항                            五馬南州感聖恩 오마남주감성은
            이어서>>>                                            여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주들이었다. 또한 혼인 등을                         시 대비했음을 느낀다. 많은 공적으로 1872년 12월 순                               形筆題樓三周世 동필제루사열세
                                                                                                                   영(巡營,  지금의  도청)에서  장계(狀啓)로  일품(一品)
                                                              통해  시로  긴밀한  인척관계로  연결되었고,  경상우도
                                                              지역의 향교와 서원에서의 활동을 주도하면서 지역의                          을 올려 줄 것을 청하였다. 임기 만료 후 1873년 12월                              白頭臨水幾驚魂 백두임수기경혼
            제3장 임진왜란과 남명학파의 활동                                여론을  이끌고  있는  지도층이었다.  따라서  임진왜란                     27일까지 연장되어 근무하였으며 특지(特旨, 특별한 왕                                   蘆洲十里霜 노주십리상연곽
                                                              초반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경상좌도가 일본                          명)로 돈녕부 도정이 제수되어 귀경하였다. 관청과 공                                   井千家雪滿盆 염정천가설만분
                                                              군에게 유린되었던 실상과, 일차적으로 안보를 책임져                         공건물의 중수와 중건은 물론 권농을 위해 천 냥의 돈
            1. 의병 활동의 배경                                      주어야 할 관군의 지리멸렬한 상태를 목격하면서 자                          을  내놓았고  분산성에  군향미(軍師米,  군량)  3백석을                             脈事國心無夢寐 진사궐심무몽침
                                                              위적 차원에서 창의활동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갖추었다.                                                          納陵黃葉下中門 납릉황엽하중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전국에서 의병 활동                     하지만 이들 의병장들의 지역적 기반이 아무리 강하                          작가의 시에서도 옛 가락국 향수와 부민사랑의 마음을
            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큰  규모로  펼쳐졌던  지              고, 애국심이 투철했다고 하더라도 특정 의병장 개인                         읽을 수 있다.
            역은 단연 경상우도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일본군의                      의 역량만으로 잘 훈련된 일본 정규군과 맞서승리를                                                                              못난 재주 진실로 산 속에서 늙는 것이 합당한데
            부산 상륙 이후 경상좌도가 처참하게 유린되고 있을                       쟁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상우도                           한식날 연자루에 올라(寒食登燕子樓) - 이학규李學                       남쪽 고을 부사 되어 성은에 감격한다.
            무립인 1592년 4월23일, 의령(宜寧)의 유생 곽재우는                  에서  유력한  가문  출신  양반들의  창의를  부추기고,                                                                        동팔기로 누각 글쓰기 삼대를 지났는데,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어  합천에서  정인홍,  김                그들 서로를 종횡으로 묶어주는 유대감의 원천으로서                                     郡城南望水雲端 군성남망수운단                          물에 비친 흰머리 보고 정신없이 놀란다.
            면등이 창의하면서 그 여파는 전국 각 지역으로 퍼져                      남명의 존재와 그 가르침에 주목하게 된다.                                            千古恨獨 천고등림한독탄                          물가 갈대 십리에 서리가 성곽에 닿았고
            나갔다. 뿐만 아니라 당시 경상우도의 의병장들이 거                                                                                       眼山川聞杜宇 만안산천문두우                          소금 굽는 집집마다 눈처럼 동이에 가득하다.
            느린 병력의 규모나 전투력은 관군을 능가하는 수준                       2) 실천과 문무겸전(文武兼全)을 강조한 남                                         半身風雨情閑 반신풍우의 난간                         진휼에 마음 깊어 잠을 꿈 꿀 수 없고
            에 이르고 있었다. 한 예로 1598년(선조 26년) 1월,                 명의 가르침                                                                                                   수로왕릉의 낙엽이 중문에 내린다.
            조정은  전국의  전투  병력을  조사하여  통계를  낸  바                                                                                 飛花音如相惜 비화암암여상석
            있었다. 그에 따르면 당시 관군은 13만 6천 700명, 의                                                                                 芳草妻妾不盡看 방초처처부진간                          김종간의 미친美親 소리 스물 일곱 번째
            병은 2만 2천 9백 명이었다. 그런데 특기할것은 2만                    남명의  문인들이  임진왜란을  맞아  가장  적극적으로                                 何事最關遊子意 하사최관유자의
            2천 9백 명의 의병 가운데 정인홍이 3천명, 곽재우가                    의병 활동에 나섰던 것은 평소 경의지학(敬義之學)의                                    故園今日食猶寒 고원금일식유한                          작가  정숙조는  음관(蔭官)  출신으로  1876년  5월  4일
            2천 명, 김면이 5천 명을 휘하에 거느리는 등 경상우                    실천정신을 강조한 데다 무예와 병법에 대해서도 깊                                                                              김해부사로 부임하여 1878년 6월 20일 정사(政事)에서
            도의 의병은 모두 1만 명으로 의병 전체 숫자의 50%                    은 관심과 조예를 지니고 있었던 남명 선생의 가르침                         고을의 성 남쪽 물과 구름 끝자락을 바라보고자                           임피현감(臨政縣監)으로  옮겨갔다.  연자루를  중수하고
            에 육박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문인들에게  계승되었기  때문이었다.  남명  선생은                     천고의 연자루에 올랐다가 혼자임이 한스러워                             누(樓)  아래에  못을  팠으며  1876년  겨울에서  1877년
            그런데 이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들과 그 휘                      평소 제자들에게 병법(兵法)과 국방 문제에 관심                           탄식한다.                                               봄까지  근고(動苦)한  사람들에게  진휼(恤)를  베풀어
            하에서  종군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남명의  문인들이                   을 가질 것을 촉구했고, 실제 제자이자 외손녀 사위                         눈에 가득한 산천에는 두견새 울음소리만 들리고                           재활한 부민들이 많았다. 음관 출신으로 부사가 된 사
            었다. 가장 대표적인 의병장인 곽재우, 정인홍,김면을                     인 곽재우에게는 병법을전수하고, 고제(高弟)인 정인                         반신(半身)은 비바람 맞으며 난간에 기댄다.                            람은 흔하지만 나이가 많아 김해부사로 와서 못사는 사
            비롯하여 조종도(趙宗道), 전치원(全致遠), 하응도(河                    홍에게는 자신이 차고 다니던 칼을 물려주었다는 기                          날으는 꽃잎 아득함으로 서로 아끼고                                 람들을 위해 규률사업을 한 애민사상이 시(詩)에서 느
            應道),  이대기(李大期),  이정(李),  박제인  (朴齊仁),              록도 있다. 이 같은 남명의 가르침은 분명 당시의 일                        아름다운 풀 무성하여 다 보지 못하네.                               껴진다. 집집마다 동이에 소금이 하얀 눈처럼 가득하다
            노흠(盧),  성여신(成汝信)  등은  모두  남명의  문하생                반적인 분위기와는 다른 선구적인 것이었다.                              나그네에게 무슨 일이 큰 관심거리일까만                               고 표현하여 당시 풍요한 김해의 삶을 느껴본다.
            이거나, 남명과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 조선 사회는 오랫동안 계속                          오늘 고향 집에는 식은 밥 먹겠지?
            그들을 도와 의병 활동에 참가했던 다른 인물들 역시                      된  내외의  평화  때문에  안일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
            직·간접으로 남명과 사제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은                      다. 또 조선 초부터 이어져온 문치주의(文治主義)                          김종간의 미친美親 소리 스물 여섯 번째                                               연자루(子) - 배 전
            진주,  함양,  삼가,  안음,  단성,  합천,  의령,  고성,  영         와  문관우위(文官優位)의  전통  속에서  무비(武備)를
            산 등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과 맞                       강조하는 목소리는 잦아 들 수밖에 없었다. 특히 경                         작가 이학규(1770~1835)는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호는                              燕子樓前楊柳花 연자루전양류화
            서 싸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경상우도의 남명 문인들                      상도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문(文)을 중시하고 무                         낙하생(落下生)이었다. 명성을  얻어 정조의  인정을 받                                   楊子陽와 양화연자석양사
            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동에 이처럼 적극적으로 참                      (武)를  천시하는  분위기가  강한  지역이었다.  임진왜                    았으며  포의  (布衣,  벼슬이  없는  선비)로  『규장전운                               飛花花天 연축비화화축연
            가했던 것은 어떤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일까?                          란이 한창이던 1593년 6월, 선조는 신하들에게 다음                       (奎章全韻)」, 편찬에 참여하였다. 왕명으로 원자궁(元                                 城中散入百姓家 성중산입백성가
                                                              과 같은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子宮, 임금 맏아들)에 내릴 책을 교수하여 바쳤다. 백
                                                              우리나라 유생들은 평소 무인(武人)을 이단으로 여겨                                                                             연자루 앞에는 버들 꽃,
            1) 남명학파의지역적기반                                                                                          서사건(書事件,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국문을 받고  유
                                                              그들 대하기를 마치 노예를 대하듯이 한다. 유생들이                         배 중 1801년 10월 김해로 옮겨졌다.                             버들 꽃과 제비가 석양으로 비껴 날은다.
                                                              오로지  어리석은  고담준론(高談峻論)만을  일삼아  문                      1824년 4월, 유배 24년 만에 아들의 재청으로 방면되었                   제비는 꽃을 쫓아 날고, 꽃은 제비를 쫓아
            남명학파의 문인들이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                       약(文)의 폐단이 극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서도 경상                                                                             성 안 백성의 집으로 흩어져 들어간다.
            고, 직접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것은 위기에 처한 종                     도가 특히 심하다.                                           다. 유배 기간 중 오직 문필에 전념하였으며 정약용 등
            묘사직과  지역사회를  수호하겠다는  근왕정신(勤王精                     전에  윤탁연(尹卓然)에게  들으니  상주(尙州)에는  활                     과 교류하였다.                                            작가 배 전은 1843~1899의 인물로 김해 출신이며 호는
            神)과  애국심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                을 쏠 줄 아는 사람이 단지 3명뿐이라고 한다.                           방면 후에 23여년간 유배 생활을 한 김해를 자주 오가
            지만 근왕정신과 애국심만으로 많은 수의 병력을 모                       이후로는 생원시나 진사시에서 무예도 아울러 시험봐                          며  문화의식  향상에  기여하였다.  포의로서  조선  임금                  차산(此山)으로 시(詩)와 서화(書畵)에 뛰어났다.
            집하고, 모은 병력을 적과의 싸움으로 이끌수는 없는                      서과녁을 맞춰 합격한 자를 뽑도록 하라                                중 뛰어났던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인재가 연자루에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상우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가락왕도를  노래하여  전해짐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                             다음호계속>>>
            의병장들의 지역적 기반에 주목하게 된다.                                                                                 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에서 창의한 의병장들은 대부                                                                            작가가 홀로 유배된 남녘땅에서 한식날 고향집 식구들                                                            김해일보
            분 이 지역의 대표적인양반가문 출신들이었다. 측 창                                         다음호계속>>>                          찬밥이라도먹는지를 걱정함이 조선 아비들의 마음이 아
            녕 조씨를 비롯하여 서산 정씨, 현풍 곽씨, 함안 조                                                                          니었을까?
            씨, 고령 김씨, 고성 이씨, 진주 강씨, 합천 이씨, 초
            계 정씨, 전주 선씨, 장녕 성씨 등의 집안은 대대로
            경상우도에서 강력한 지역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                                                           김해일보
            다. 이들 집안은 대개 상당한 토지와 노비를 보유하
                                                                                                                           2021년도 문화재 돌봄사업 사업자 공모

               김해문화재단 독서경영 우수 직장 인증                                                                                 - 도내 동·서부권역 사업자(수행기간 2년) 각각 선정, 도내 721개 문화재 관리

                                                                                                                    - 문화재 보존관리 관련 비영리 법인·단체, 사회적기업 참여 가능
                                                                                                                    - 2일부터 16일까지 직접 방문접수만 가능


                                                                                                                    경상남도(도지사  김경수)가  도내  국가  및  도지정문화                   2021년에  총  22억  원  규모의  예산으로  도내  721개소
                                                                                                                    재, 등록문화재, 비지정문화재 등을 상시 관리할 ‘경                       문화재를 관리하는 이 사업에는 취약계층 및 지역주민
                                                                                                                    남도 문화재 돌봄사업’수행 사업자를 공모한다.                           인력이 활용될 예정으로, 문화재 관리뿐만 아니라 지역
                                                                                                                    ‘문화재 돌봄사업’은 문화재의 소유·관리자가 없거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전
                                                                                                                    나 관리능력이 없는 문화재에 대해 점검(모니터링), 경                      망된다.
                                                                                                                    미수리 및 일상관리 등 상시 관리를 통해 문화재 원형                       공모는 11월 2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되며, 직접 방문접
                                                                                                                    을  유지하고  훼손을  최소화하는  사업으로  2013년부터  수만  가능하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경남도  홈페이지
                                                                                                                    시행해오고 있다.                                           공고·공지사항을  참고하거나,  경남도  가야문화유산과
                                                                                                                    이 사업은 2개 단체가 동·서부권역을 각각 나눠 관리                       (055-211-4584)로 문의하면 된다.
                                                                                                                    하는 방식으로 2021년부터 2년간을 사업수행 기간으로                                                            윤갑현 기자

                                                                                                                    운영하며, 문화재 보존관리 관련 비영리 법인·단체 또                                                 gimhae114@naver.com
                                                                                                                    는 사회적 기업이 참여 가능하다.





          (재)김해문화재단이  독서경영  우수  직장으로  인증됐다.  모임 지원 예술책장 운영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신규
          경남도 내 출자 출연기관으로는 유일하다.                              인증기관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대한민국 독서경영 우수 직장 인증제도’란 문화체육                        재단 관계자는 “‘독서로 즐거운 문화재단, 독서로 만
          관광부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주최하고  국가브랜                      드는  문화도시’라는  비전  아래  오는  2023년까지  중장
          드진흥원이 주관하는 것으로, 독서 친화적 기업과 단체                       기 계획을 세워 독서경영을 시행해오고 있다. 이번 우수
          를 발굴해 인증 수여하는 사업이다.                                 직장 인증으로 그간 해온 노력의 결실을 보게 되어 기쁘
          지난 7월 1일 신청 접수를 시작으로 현장 확인 및 심사,  다.”며 “독서경영을 통해 축적한 지식과 창의성을 바
          서류 심사, 최종 심사로 구성된 총 4개 관문을 거쳐 최                     탕으로  지역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
          종적으로  지난  10월  22일에  결과가  발표됐다.  7회째를  다”고 말했다.
          맞는  이번  인증사업에는  전국의  민간기업  및  공공기관  한편 김해문화재단은 ‘문화와 예술로 김해의 일상을 풍
          140곳이  접수를  했으며,  출판 도서관  전문가,  언론기관  요롭게’라는 미션 아래 문화예술 및 관광 스포츠 분야
          종사자, 경제 경영 전문가로 구성된 총 10명의 심사위원                     총 10개 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며, 김해 시민 삶의 질 향
          회의 공정한 심사를 통해 총 132개 기업 및 기관이 독서                    상과 문화 복지 증진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경영 우수 직장으로 인증받았다.
          이중  김해문화재단은  독서콘서트  정기  개최 사내  독서                                                           윤갑현 기자

                                                                                          gimhae1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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