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0 - 동북포루 수리보고서-2020.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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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포루 복원정비공사 보고서
동북포루는 1796년(정조 20) 5월 15일 완공되었다. 동북포루는 조선 중기 1796년 정조 20년, 5월 15일에
준공되어 큰 변화 없이 유지되어 오다가 1848년 중수되었다.
중수 이유는 1846년 6월 9일에 발생한 대 홍수가 원인이었으며 각건대는 다른 시설과 함께 수리되었다.
4) 이에 관한 기록은 수원부계록『水原府啓錄』에서 살펴볼 수 있다.
1963년 01월 21일 수원 화성은 사적 제 3호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6.25 전란에 의하여 소실된 후 현존
하는 몇 건물 외에 여러 건물들이 복구되지 못하였다. 1974년대 조사 당시 동북포루는 주초석만 남아
있었으며 1976년에 수원성복원정화사업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의 보수과정을 거쳐 오늘
에 이르고 있다.
동북포루 각건대에 관한 창건기록은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되어 있으며, 중수에 관한 기록은 『수원
비계록』에 기록되어있다. 도면 자료는 『화성성역의궤』에 각건대 내도(內圖), 외도(外圖), 2점이 그려져
있으며, 『뎡리의궤』에 채색이 가미된 각건대 내도, 외도 2점이 남아있다. 1979년에 화성복원 완료 후
1980년에 발간된 『수원성복원정화지』에는 동북포루의 현황과 건물 복원에 사용된 참고 문헌기록과 복
원된 건축물의 양식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외에도 당시 복원에 사용된 재료, 비용, 도면 등이 남아있다.
동북포루 관련 도면은 수원성 측량도Ⅳ, 평면도, 정면도, 횡단면도, 지붕 앙시평면도가 남아있다.
1-3. 1976년 복원정화사업
우리나라의 문화재보호에 있어 일제강점기인 1910년부터 문화재 보호법이 시행되기 전인 1962년 까지는
문화재 보호의 암흑기라고 불리 운다. 수많은 문화재가 보호와 학술이라는 명분하에 수난과 수탈이 이
루어졌다. 1933년 8월에는 “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 에 의하여 문화재 보호가 이루어졌다 5)
고 하나 보존적 측면에서는 건축물의 전통재료가 아닌 시멘트와 같은 신개발재료의 첨가, 쌓기나 치목
방식에서 일본식 공구와 시공방법으로 변경 및 교란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수원화성은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고적 제 14호로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광복이후에는 사적
으로 재 지정되었다.
광복이후는 새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전문기관이 없었으며, 1950년에는 3년간의 한국전쟁을 겪었다. 수원
성 또한 6.25 전란 때에 큰 손상을 입었다. 전란이후 잔존한 건물은 팔달문, 화서문 및 옹성, 동장대, 화
6)
홍문, 방화수류정 등이고 그 외는 거의 도괴 소실되었다.
전란이후 전 국토의 수많은 문화재뿐만 아니라 삶의 터전이 파괴되어 이를 복구하고 경제개발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때문에 이때 경제개발로 인한 문화재의 중요성도 소홀한 점이 없지 않았다.
그러다가 1962년에는 문화재를 담당하는 기관이 설립되어 문화재보호법이 시행되었으며, 제 3공화국 개
정헌법과 동시에 공시된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일제시대에 보존령에 의하여 지정되었던 문화재가 재지
정 되었는데. 수원화성은 당시 이러한 과정의 일환으로 일제하에서 고적으로 문화재 지정되었던 것이
우리 정부 하에서 1963년, 사적 제 3호로 재지정 되었다.
4) 비변사 『水原府啓록』-수원부계록, 1845~1877, 규장각 소장/ 수원 서북공심돈 정밀실측조사보고서 2012, 33p,
城堞樓櫓水門各處修改秩(성첩누로수문각처수개질)에는...팔달문 각건대 방화수류정 남암문 동남각루 남 루 화양문 서장대 서 루
이상 중수라고 쓰여 있다.
5) 건축문화재보존과 그 과제, 한국건축역사학회 연구논문, 장헌덕
6) 수원성복원정화지, 수원시, 1980, 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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