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1 - 동북포루 수리보고서-2020.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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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연혁 및 건축 현황
수원화성이 사적으로 지정된 후 보수실적을 살펴보면 잔존한 건축물을 중심으로 해체보수, 성곽 일부보
수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꾸준하게 이어졌으나 소실되거나 변형된 문화재의 복원은 이루어지지 못하
고 있었다. 성역일부가 파괴되었으며, 도시계획에 따라 철거되고 시가지화 되어 유구가 교란이 된 지역
도 많았다. 일제시대에 보수된 일부 건물의 경우 일본식으로 지붕 보수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성벽의 경
우 시가지화 되면서 도로개설로 성벽의 좌우가 절단되었다. 일부 구간은 성곽을 관통하여 간선도로가
놓이고 민간인들의 삶의 터전 또는 시장화 되어 복원이 불가할 정도로 변형되었다.
시기적으로 1970년대는 문화재보존의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하였으며 제3차 경제개발계획이 성공적으
로 거의 끝날 무렵으로 어느 정도 한숨 돌린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자국 민족문화의 자긍심과 국민의
공감대 위에서 문화재 보호가 국가뿐만 아니라 국민이 같이 해야 한다는 의식의 발현된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문화재 보호정책은 일제가 망가뜨린 문화재를 복원하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수원성(水原城), 일명 화성(華城)은 조선조 정조의 부왕(장헌세자)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양주 현릉원에
서 화산으로 옮기면서 수원의 읍치와 민호도 현재의 팔달산 아래로 옮기고 쌓은 성이다. 또한 능행 시
머무를 수 있도록 행궁을 지었다. 수원 화성은 도성의 방위와 당시 사회윤리기강인 충효사상에 바탕을
둔 대역사로 당시의 정치사회제도의 정신적 기반을 그대로 실천하였으며, 창의적이고 정교한 석축과 축
성기술이 남아있는 문화유적이다. 긴 시간 외세의 침입을 겪고 전란으로 분단이 된 현실에서 국방문화
유적지를 정비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국방유적 정화의 일환으로 수원성의 복원의지가
피력되어 1974년 7월 수원성의 복원보수정화사업의 시행계획을 수립하도록 하였다. 7)
이후 수원 화성은 1975년부터 1979년에 이르는 약 5년간의 단계별 시행 복원과정을 통하여 복원이 가능
한 중요시설은 전면 복원하였으며, 퇴락된 성벽보수를 진행하고, 사유지 매수와 민가를 단계별로 철거
이주시켜 주변을 정화한다는 방침 하에 복원을 시행완료 하였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북포루는 6.25 전란이후 주초석과 계단의 기초만 남은 상태로 있다가 복원이 진행되었다. 당시 동북포
루의 현황 및 복원정화사업을 통하여 완공된 건축의 현황에 관한내용은 『수원성복원정화지』의 기록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원성에 포루는 5개소에 있으며 그 제도는 치성 위에 포루를 세운 것이며 층루로 되어 그 하층 에서도 총
포혈을 내었으며 필요에 따라 성벽도 전축으로 하였다.
동북포루는 방화수류정과 동장대 사이에 있으며 성곽의 굴곡 돌출부에 자리하고 있다. 성벽은 잔존하였으나
포루는 인멸되고 주초석과 계단의 기초부분만 남아 있었다.
성벽은 3면이 돌출되고 하부1.46m까지는 석축으로 하고 위는 전돌로 쌓고 상부에 여담을 쌓았다. 성곽의
높이는 4.02m이나 누의 하층바닥은 성의 상부면 보다 57cm낮게 되어 있다. 누각은 중층이며 전면 2칸, 측
면 2칸이나 남측면은 중간에 작은 기둥을 써서 3칸으로 하였다. 각층의 바닥면적은 18.45m2 (5.58평)이며
연면적은 36.9m2 (11.6평)이다.
하층바닥에 화강석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각기둥을 상층까지 통재로 세웠다.
7) 수원성복원정화지, 수원시, 1980, 34p, 보고서에는 1974년 7월에 대통령(박정희) 각하께서 말씀하신 뜻을 따라 문화재관리국장
및 경기도 지사는 전문가 전문위원 및 관계직원에게 수원성의 복원 보수정화사업의 시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고 쓰여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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