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 - 2022강화산-존재의 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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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존재의 근원과 연관 지어 그 깊이를 더하고 있다. 생각에 침잠하여 모색하고 선적(
                                         禪的)인 경지에 가깝게 붓 가는 데로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인다. 작가 강구원의 그
                                         림은 시처럼 간결하면서도 짙은 여운이 담겨 있다. ‘우연의 지배’란 우리가 주체적으
                                         로 우연을 지배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우리가 객체가 되어 우연에 의해 지배당한
                                         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이렇듯 우리 인간이 맺는 우연과의 관계는 주체와 객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우연‘ 안에서 주객은 하나가 된다.
                                           “우연의 지배-소네트”에서 작가 강구원이 제시한 우연의 지배와 연관된 소네트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소네트 8) 에서 사용한 것이다. 시
                                         인인 화자, 시인의 고귀하고 수려한 젊은 남자 귀족, 눈과 머리카락이 검은 여인을 둘
                                         러싼 사랑과 갈등을 그린 이야기다. 소네트에서 시간은 아름다움을 뺏어가는 원망의
                                         나쁜 이미지로 그려진다. 작가 강구원은 붓으로 그리는 표현 방법에 머무르지 않고
                                         이를 확장하여 나무나 철선 등의 오브제를 사용하며 다양한 표현기법을 활용한다. 여
                                         러 색채를 가능한 한 배제하고 단색 위주로 하되 자연에 대한 관조와 더불어 숨어 있
                우연의지배-고요와 울림, 130.0x110.0cm,  는 질서를 느낄 수 있다. 예술은 무질서와 혼란스러움 뒤에 숨어있는 질서를 찾아 모
                           캔버스에아크릴, 2010
                                         색하는 과정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생명은 지극히 우연성에서 탄생하지만, 그 근저
                                         에는 필연이라는 운명론과 겹쳐 있다. 지배’라 함은 절대자 안에서의 자유로운 다스
                                         림이며, 작가의 예술 의지의 연장선 위에 펼쳐진다. 이렇듯 “우연의 지배 -소네트”는
                                         우연적인 삶을 다스리는 필연에 의한 사랑의 예찬이다. 셰익스피어 소네트가 인간의
                                         다양한 정서를 절제된 시행(行)에 녹여낸 것처럼, 작가 강구원은 이를 자기 작품으로
                                         체현하고 있다. 생명과 삶, 사랑과 자유와 같은 상징을 자연의 오묘한 질서와 조화에
                                         맡기며 우연과의 관계 설정을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미술비평가 민동주는 강구원의 ‘우연의 지배’에서 ‘원시적 표현주의’를 읽는다. 말
                                         하자면 인간 의지의 너머에 있는 원초성을 본 것이다. 이 원초성은 근원과 맞닿아 있
                                         다. 이는 자연 질서의 일부이며 절대자의 섭리요. 진리 가운데 있다. 또한 사학자이
                                         자 비평가인 이석우는 강구원의 그림에서 “진실에 도달하려는 진지한 모색”을 지적
                                         한다. 그의 작품 세계는 초기엔 구상적 접근과 더불어 사회적 인식을 작품에 담으면
                                         서 차츰 ‘우연의 지배’라는 주제에 몰입하고 추상으로 변화되었다. 여기에서 추상이
                                         란 가장 구체적인 것의 정수(精髓)를 추출하여 낸 것으로 의미의 압축이요, 상징이다.
                                         이런 과정에서 강구원은 어떤 형식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는
                                         자세를 보이며 명상하고, 선적(禪的)인 붓 터치를 한다. 이리하여 그의 그림은 간결하
                                         면서도 함축미를 지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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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여백과 삶의 리듬을 우연과 연관하여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시 예술에서의 시
                                         란 “미적 우연 혹은 우유성(aesthetic accident)에 의하여 진리를 내포하고 있을 수
                                         는 있으나, 이것이 시적 본성을 이루는 부분은 아니다.” 미적 우연에 참된 이치, 곧 진
                                         리가 내포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곧장 시적 본성의 부분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7) 불교에서 귀하게 여기는 세 가지 보물인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가 있다. 불보는 중생들을 가
                                         르치고 인도하는 석가모니, 법보는 부처가 스스로 깨달은 진리를 중생을 위해 설명한 교법, 승보는 부처의
                                         교법을 배우고 수행하는 제자 집단으로, 중생에게는 진리의 길을 함께 가는 벗이다.
                                         8) 윌리엄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 소네트, 김용성 역, 북랩, 2017 참고. 소네트는 14행시로 이루진 총 154
                                         편이다. 집필 시기는 1592년에서 1598년 사이로 추정된다.
                       우연의지배-생명, 97x162cm,
                           캔버스에아크릴,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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