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 - 2022강화산-존재의 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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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다. 그런데 우연한 일에 어떻게 진리가 내포될 수 있는가. 이는 곧 우연과 진리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진리의 문제는 필연과 우연으
로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시로 섞여 있을 수 있다. 대체로 우연이 필연 안에 포섭되어
진리의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이는 곧 시적 우연이 시적 진실 혹은 시적 진리의
영역 안에 위치하는 것이다. 미적 우연이 시의 본성을 이루는 부분은 아니지만 어떻
든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9)
우연의 지배- 세익스피어 소네트 ,캔버스에 아크릴. 노
미국의 화가이자 조각가이며 판화가인 엘스워스 켈리(Ellsworth Kelly, 1923~2015) 끈, 97x50cm, 2017
는 선과 색, 형태를 강조하면서 예측할 수 없는 기법들을 표현한 인물이다. 그는 “구
성하고 싶지 않다. 빨간색과 파란색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저곳에 노란색이 있어
야 한다는 걸 알아내고 싶지 않다. …우연히 작업이 이루어지게 놔두고 관객과 회화
사이에 어떤 개성이 개입하지 않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거다. 작품 자체로 존재하도
록 놔두는 거다”10)라고 말한다. 의도적인 구성보다는 작품 자체가 우연에 기대어 스
스로 되어가도록 놓아둔다는 것이다. 그가 언급한 ‘예측할 수 없는 기법’은 우연의 개
입과 맞닿아 있다. 영국의 대표적인 미술비평 가인 마틴 게이퍼드(Martin Gayford,
1952~ )는 켈리의 이러한 작업방식과 작품이 선적(禪的)인 성격을 담고 있음을 알았
다. 이를테면 우연히 작업이 이루어지게 놔두는 것’은 마음이 자연스레 흘러가는 대
로의 방향인 것이다. 선(禪)이란 ‘마음을 한곳에 모아 고요히 침잠하며 생각하는 일’
이며, ‘자신의 본성을 구명하여 깨달음의 묘경(妙境)을 터득’하는 것이다. 자연에 맡
기듯 우연한 흐름의 방향이 곧 마음이 가는 곳이다. 모든 것의 근본은 마음이며 마음
이 지향하는 바는 필연과 우연의 구분을 넘어 자유분방함의 경지 그 자체이다. 참선
수행하는 여러 선승이 체험하고 들려주는바 그대로인 것이다. 이는 강구원의 작품이
추구하는 세계와 맥이 닿아 있다.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과 그 뒤에 숨어 있는 본질과의 연결고리를 늘 생각해 볼 필요
가 있다. 현상과 본질, 우연과 필연, 확실성과 불확실성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우
연’이나 ‘우발’같은 것은 없다. 모든 사건은 그에 앞서는 원인, 그리고 이후에 발생하
는 결과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무지(無知)로 인해 과거와 미래를 모두 보지 못하
기 때문에 사건은 허공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처럼, 즉 우연인 것처럼 보일 때가 많
다.”11)는 것이다. 작가 강구원이 지속해서 탐구해온 ‘우연의 지배’란 예기치 않은 곳
에서 어떤 힘이 우연처럼 작용하는 관계성과 필연적인 질서를 갖는 것이다. 그 안에 우연의 지배-소네트
Incidental Dominion in life - Sonnet
자연과 생명의 원리가 있는 것이며, 강구원의 작품 세계가 지향하는 것이다. 캔버스위에 아크릴. 나무. 실.와이어
162.2x112.1cm, 2020
9) Sidney Zink, “Poetic Truth”, The Philosophical Review, 54, 1945, 133쪽.
10) Martin Gayford, The Pursuit of Arr. Travels, Encounters and Relations,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9, 마틴 게이퍼드, 『예술과 풍경』, 김유진 역, 을유문화사, 2021, 262쪽.
11) Annie Besant, The Ancient Wisdom, 1897. 애니 베전트,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황미영 역, 책읽는 귀족, 2016, 3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