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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산리 인근 마을인 부산동(釜山洞) 거주의 홍덕필(洪德弼), 홍덕원(洪德元), 홍낙인(洪洛仁),                                     201
                  홍화여(洪化汝), 홍경진(洪敬辰), 홍춘근(洪春根), 홍춘흥(洪春興), 홍광문(洪光文), 홍치덕(洪致德) 등                                    역사

                  남양홍씨 일가와 임명덕(任明德), 이화성(李化成), 이순교(李順敎), 안영삼(安永三), 박흥천(朴應天)                                        /  유적
                  등의 토지 소유자는 다른 부재지주와는 다른 존재들이다. 이들은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라 할 수

                  있다.                                                                                             · 유물
                    그래서 오산리 809필지 가운데 오산리 거주 조선인 토지 소유자는 24명에 불과하다. 즉 이병필(李

                  丙弼), 이병두(李丙斗), 이명삼(李明三), 이명화(李明化), 이치대(李致大), 이치홍(李致弘), 김주열(金
                  周烈), 김광문(金光文), 김광운(金光雲), 김인선(金仁先), 김응서(金應瑞), 류병선(柳秉先), 송건엽(宋

                  健燁), 공한영(孔漢泳), 홍광심(洪光心), 강기련(姜箕連), 정순경(鄭順慶), 유응준(兪應濬), 정춘섭(丁
                  春燮), 정재홍(丁大弘), 황연식(黃鍊植), 하진흥(河鎭興), 공인석(孔仁錫) 등이다.

































                                          그림 7. 오산리 토지조사부 일부 – 국가기록원 소장



                    오산리의 거의 대부분이 부재지주의 땅이었다. 오산역이 위치한 오산리의 경제적 양상과 구조적
                  모순을 잘 보여주는 셈이다. 일본인 부재지주와 전직 고위관료들을 비롯한 서울 및 수원읍내 거주 부

                  재지주의 광범한 존재는 오산역을 중심으로 한 역세권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측면은 이후 오
                  산지역 사회운동의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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