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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人의 田沓이在於水原郡淸好面釜山而沓十一石九斗落과 田十五日耕文券을 置於鄕第矣러
니 去月分賊擾에 셔失故로 廣告오니 誰某拾得와도 休紙施行 篩洞 李丙薰 告白
서울 절동에 사는 이병훈(李丙薰)은 원래 부산동 출신으로 서울로 이주한 인물로 보인다. 부산동
소재 토지 문권(답11석9두락, 전 15일경)을 1907년 10월 의병들에 의해 고향집에서 분실되었으니 휴
지 처리하라는 광고를 하고 있다. 37)
표 5. 수원지역 표준지별 토지가격(1913)
토지별 가격 논 (1反) 밭 (1反) 택지 (100평)
상등지 매매가 80원 40원 20원
중등지 매매가 50원 25원 15원
하등지 매매가 30원 15원 10원
상등지 남부면 지동 청호면 오산 청호면 오산
표준지명 중등지 매곡면 1동 안녕면 간촌 초평면 1동
하등지 장주면 매탄리 형석면 구운동 안녕면 반정리
수원지역에서 오산은 밭이나 택지가 상등지로 평가받으며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
38)
다. 이에 이들 대한제국기 유명한 고위관료 외에도 오산리 토지를 소유한 서울에 거주하는 부재지
주들이 많았다. 즉 안인호(安仁濩, 경성부 중부 수전동), 박대혁(朴大赫, 경성부 서부 반석방 자암동),
김완수(金完洙, 경성부 서부 반석방 개정동), 김근수(金根洙, 경성부 중부 장통방 소립동), 한진달(韓
鎭達, 경성부 중부 장통방 동곡), 이완식(李完植, 경성부 서부 양생방 양동), 이병훈(李丙薰, 경성부
남부 여경방 절동), 이병묵(李丙黙, 경성부 북부 서린방 모교동), 박제원(朴齊元, 경성부 중부 경행방
교동), 이근수(李根洙, 경성부 중부 장통방 소립동), 차인태(車仁台, 경성부 중부 반석방 연지동계 양
동), 김철현(金喆鉉, 경성부 남부 광통방 다동계 다동) 등 12명이 오산리에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한편 서울 이외에 수원과 안산 등지에 거주하는 부재 지주들도 오산리 땅을 소유하고 있다. 즉 수
원읍내 수원군 남부면 구천동의 심운학(沈雲鶴), 이선익(李善益) 및 남부면 남수동의 최암(崔巖), 북
부면 신풍동의 김선익(金善益), 북부면 북수동 박종하(朴宗夏) 등이다. 그 외 수원군 형석면 이목동
오산시사
한형리(韓炯履), 동북면 반송리 김현국(金顯國), 산성면 양산리 문병상(文炳相), 어탄면 전곡동 임한
규(林漢圭), 어탄면 송촌 김종응(金鍾應) 및 안산군 월곡면 대대동의 이종익(李鍾翼) 등이다. 이들은
제 서울 거주 부재지주들의 토지 규모보다는 작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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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37) ‘本人의 田沓이 在於水原郡淸好面釜山’, 『대한매일신보』 1907. 11. 7.
200 38) 酒井政之助, 『發展せる水原』, 1914, 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