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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 타라 미사오(設樂操) 등이다. 이들 외에도 전답을 소유하지 않은 채 일본인 상점의 점원이거나 199
일제의 통치기구에 근무하는 다양한 일본인들이 있었던 셈이다. 관리와 경찰, 철도원, 교사 등 다양 역사
한 일본식민 통치기구에 구성하는 일본인들이었다. 시타라 미사오(設樂操)는 1912년 일본인 오산공 / 유적
립심상소학교 훈도였지만 1만4,039평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국무농장 4,270평, 미야타 쿠니지로
(宮田國次郞) 2,251평, 사카모토 신조오(坂本眞藏) 2,199평, 아오키 신이치(靑木愼一) 1,618평, 사카구 · 유물
치 초사쿠(坂口猪作) 1,292평, 신키치 사다지로(信吉定治郞) 1,044평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비해 중
국인들은 8평, 24평의 영세한 점포를 소유하고 있어 일본인들과 비교되고 있다.
3. 오산리의 조선인 토지소유와 부재 지주들
오산리 토지 가운데 일본인 이외에 유력한 인물들의 소유가 주목된다. 당시 고위관료였던 한규설,
신태휴, 윤웅렬, 김각현 등이 그들이다.
군부대신을 역임한 한규설(韓圭卨, 1848~1930)은 오산리에 전답 2만949평(대 120평, 전 4,108평,
답 16,721평)을 소유하였다. 경성부 남부 대평방 리동에 거주하는 부재지주였던 한규설은 대한제국
기 궁내부특진관, 법무대신, 의정부 참정대신 등을 역임한 고위 관료였다. 1905년 을사늑약 당시 끝
까지 반대하였고, 1910년 일제가 수여한 남작 작위를 받지 않고 칩거하였다. 애국적 관료로 이름이
높았다.
대한제국기 경무사(警務使)로 이름을 날렸던 신태휴(申泰休)도 오산리에 전답 1만3천100평(전 453
평, 답 12,647평)을 소유하였다. 밭 453평을 뺀 나머지 1만2,647평이 모두 논이라는 점이다. 경성부
남부 훈도방 수표교에 거주하는 부재지주였던 신태휴는 대한제국기 육군참장, 육군법원장, 경무사,
의정부찬정, 경상북도관찰사, 평안북도관찰사, 궁내부특진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의 아들 우창 신
석우(申錫雨, 1894~1953)는 1924년 만석꾼인 아버지 신태휴를 설득하여 당시 8만5천원을 주고 조선
일보사를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군부대신을 역임한 윤웅렬(尹雄烈, 1840~1911)도 오산리에 토지 6천416평을 소유하였다. 거의 대
부분이 논이다. 윤웅렬은 좌옹 윤치호(尹致昊)의 아버지로 갑신정변과 춘생문 사건에 관여한 친일파
관료로 ‘한일합병’에 대한 공로로 남작 작위를 받았고,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수원 출신 관료였던 김각현(金珏鉉, 1864~ ?)도 오산리에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였는데, 특이한
점은 대부분 집터와 상가 터라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차별성을 갖는다. 김각현이 소유한 오산리
4,423평(전 870평, 답 1,394평 대 2,159평) 가운데 전답 3필지를 뺀 나머지 2,159평은 16필지가 대
(垈)라는 점이다. 이는 오산시장의 점포가 상당수였다는 점에서 상업적 이익을 극대화한 투자로 볼
수 있다. 김각현은 1896년 이후 외부 참서관(外部參書官)·교섭국장(交涉局長)·동래부윤을 지냈고,
1899년 이후 학부 학무국장(學部學務局長)·법부 사리국장(法部司理局長)을 거쳐 1906년에는 시종
원 부경(侍從院副卿)이 되었다. 이어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을 거쳐 법부 차관·궁내부 협판
(宮內部協辦)·제실회계심사국장(帝室會計審査局長)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