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 - 오산문화 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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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VOL. 63  osan culture



                조선 유학의 상징, 오산화성궐리사                          탕평정책, 육성정책의 목적
                국가가 공식적으로 건립한 오산화성궐리사를 통해 백성                정조는 오산화성궐리사를 단순히 공자의 제향과 수원 지
                을 위한 합리적 개혁을 실현하고 유학의 본질적 가치를               역민의 교육만을 위하여 건립한 것이 아니라 탕평정책을
                더욱 높이겠다는 것이다. 이만큼 오산화성궐리사는 조선               일환으로도 건립하였다. 충청도 이성에 건립된 궐리사가
                유학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이러한 의도를 표현하              붕당정치로 인하여 소론이 장학한 노성 일대의 향촌사회
                기 위하여 직접 궐리사 편액을 하사하여 오산화성궐리사               에 노론이 소론을 견제하고 감시하기 위하여 만든 것임

                의 위상을 한껏 높여주었다. “孔氏가 우리나라에 건너와              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당파싸움의 연장으
                맨 먼저 수원에 정착한 사실이 읍지에 실려 있는데 일전              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정의 명으로 건립된 오산화
                에 도신으로 하여금 그곳의 형태를 그림으로 그려 올리게              성궐리사를 유일한 공자의 궐리사로 인정하고 이를 통해
                하여 그 그림에서 찾아보니 闕里祠란 祠宇도 있고 은행나              당파의 폐단을 근절하고자 한 것이다. 더불어 정조는 화
                무도 심어져 있으며 대대로 눌러 사는 후손들도 있었다.              성신도시 육성정책의 일환으로 오산화성궐리사를 건립한
                또 闕里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는 새로 지은 影堂이 있             것이다. 국가에서 만든 유일한 궐리사를 건립함으로써 화
                다고 하였다. 文獻公(공서린) 의 시호를 내린 뒤로도 조정            성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성이 곧 노론학
                이 공씨 집안을 우대하는 일에 있어 보통 예와는 달리해              통의 지류를 이루고 있는 기호지역과 호서지역과 퇴계 이
                야 할 것이니 도백으로 하여금 궐리 옛터에다 집 한 채를             황의 학통을 이은 영남지역보다도 더 중요한 유교의 계승

                세워 내각에 있는 聖像을 모시게 하고 영당에 모셨던 진              공간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싶었던 것이다. 최근 한류로
                영眞影도 모셔다가 함께 봉안하고서 이름을 궐리사라 하               인하여 엄청난 인원의 중국 관광객이 한국으로 몰려들고
                라. 사우의 편액은 써서 내리겠다. 봄·가을로 지방 수령에            있다. 이로 인하여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중국 관광객 유
                게 香과 祝을 내려 제사를 모시게 하고 제사에 쓰이는 제             치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수들은 대략 이성(尼城) 궐리사(闕里祠)의 예대로 시행하             오산시는 현재 중국인들이 가장 숭배하는 공자의 진짜 사
                되 한사코 정갈하고 간략하게 하라. 그렇게 하고 나면 이             당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 당국과 한국의 관광 회사에 적
                른바 새로 세웠다는 영당은 고을 유생들이 사사로이 세운              극적인 홍보를 하여 화성과 에버랜드를 방문하는 중국 관

                것에 불과하고 또 간직했던 영정마저도 함께 봉안하였으               광객을 오산화성궐리사로 유치하고 궐리사를 방문한 이들
                니 재목이며 돌들도 당연히 이곳에다 옮겨 세워야 할 것              이 다시 독산성을 방문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유치 전략
                이다. 어찌 감히 사사로이 제향을 드릴 일이겠는가. 서원             을 수립하고 실천하여 지역 경제 활성화와 더불어 오산의
                지키는 재생(齋生)에 있어서도 그 마을에 대대로 살아온              역사 문화적 가치를 알려주기를 기원한다.
                공씨를 시키도록 하고 다른 유생은 감히 섞이지 못하게
                하여 시비거리가 없도록 하라. 이 전교를 써서 강당에다
                        1)
                게시하라.”  정조는 오산화성궐리사가 공서린의 생가 옛터
                에다 만든 것임을 밝혀주면서 봄과 가을에 화성유수로 하
                여금 제향을 올리게 하였다. 자신의 이와 같은 생각을 아

                예 새겨서 강당에다 게시하게 하라고 하였다.




                1) 『正祖實錄』卷36, 16年 10月 戊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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