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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하는 이를 모시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여기에 의미를 더하는 것은 가래떡을 올린다는 점이다.                                          129
                  가래떡을 용떡이라고 하면서 제의에 올리고 있는데 용떡은 어업을 주로하는 지역에서 용왕에게 올리                                            구비전승

                  는 제물이다. 그런데 마을의 어디에서도 쉽게 물길의 존재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떤 연유
                  와 까닭에서 용떡을 올리게 된 것일까? 좀 더 소상하게 세밀한 제보와 연구가 있어야겠으나, 필자의                                          · 민속

                  생각과 판단으로는 부산동이 오산천과 맞닿아 물길을 접하고 있었을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                                             · 경기도당굿과
                  다. 현재 보여지고 있는 모습으로가 아니라 그 옛날의 지형과 그 특성은 적어도 100년 전, 200년 전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래전 부산동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형성되는 과정에 나타났던 역사의 진행과정이
                                             4)
                  었을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경기재인청
                    그리고 갈곶동에서 낙지를 올렸다는 것도 매우 특기할 자료이다. 이는 갈곶동의 당집에서 모시고
                  있는 신위(神位)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바로 ‘城隍之神位 康座上神位(성황지신위 강좌상신위)’의

                  위패가 그것이다. 갈곶동은 강씨들의 마을이다. 그러니 강좌상(康座上)을 마을의 신으로 모시고 있                                            /  성씨
                  다. 좌상(座上)이라 여럿 가운데 가장 어른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 마을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강좌                                         · 인물

                  상을 마을 대동(大同)의 신으로 좌정(坐定)시킨 것이다.
                    또한 궐동과 금암동에서 감 10개를 제수로 올리는 것도 마을의 특성을 드러내는 근거가 된다. 궐동

                  은 곡부 공씨들의 집성촌으로 공서린 선생을 입향조로 모시고 있다. 제수로 올리는 감[柿]이 왜 10개
                  인지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으나 곡부공씨들의 시제와 관련이 있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그리고 이

                  는 오산화성 궐리사(烏山華城闕里祠)의 뒷산인 문산(文山) 줄기를 따라 금암동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
                  으로 보인다. 그러니 금암동의 마을신앙은 산 너머의 마을인 세교동과의 관련성과 궐동과의 연계성

                  속에 금암동만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 밖에도 수청동과 벌음동에서 구운 고기인 적(炙)을 올리는 것도 부산동에서 대구포를 올리는 것

                  도 모두가 마을의 형성과정과 마을의 특성을 드러내는 요소들이다.







                  3. 오산시 마을신앙의 전승양상(傳承樣相)


                    오산시 마을신앙의 전승양상은 다음과 같았다. 마을신앙의 제반 여건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오산시 마을신앙의 전승현황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이

                  에 각 마을에 전승되고 있는 마을신앙의 양상(樣相)을 기술하여 그 이해를 돕고자 한다.










                  4)  화성시의 당성에 올라 현재의 모습으로 천년 전의 모습을 동일하게 보아서는 안된다. 이는 적어도 신라와 당나라가 서로 교류하였던
                    그 지점에서 당성의 모습을 보고 들판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지금은 들녁이지만 당시에는 바다였다. 그러니 원효와 관련하여 평택과
                    화성이 서로 주장하는 바는 비단 우리의 문화적 역사적 인물을 원효를 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원효는 전국 도처에 그의 기행과 이적에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며 그리하여 전국 도처가 원효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화교섭으로 보는 경기만」,
                    김용국. 『경기만 포럼』.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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