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7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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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  별장  터








                    오산의  지명에  박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지명의  유래가  박영효  별장에  연유한
                  다는  설이  정설로  되어있다.
                    박영효는  조선말  개화사상가와  혁명가로  이름을  떨쳤던  사람이다.  그  후  일제강점
                  기에  친일  행적이  있어  그의  명성이  빛바랬지만,  이점이  또한  이번  이야기의  주제
                  가  된  버릴  수도  끌어안을  수도  없는  것들의  이야기이다.
                    박영효는  1861년(철종  12)  수원에서  진사  박원양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

                  으로  그의  집안은  조선  후기  노론  척족세도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게
                  다가  1872년  4월,  12세에  철종의  부마가  되며,  금릉위  정일품  상보국숭록대부가
                  되었다.  그의  지위는  노론  세도가  속에서도  막강했다.  3개월  만에  사별한  그의  부
                  인인  영혜옹주와는  너무  짧은  삶이었다.

                    어릴  적  마을의  전설처럼  내려오던  동탄면  금곡리(현  오산시  은계동)에  별장을  가
                  지고  있었다는  박영효에  대한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다.
                    이  이야기에  의하면  박영효는  흰말을  타고  다녔고,  오산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도
                  박영효가  손을  들어  멈추게도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  당시에  그의  권력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유추할  수  있겠다.
































                                                   박영효  별장  터,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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