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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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현종 9년(1018년)에 수주로 승격되어 지수주사(知水州使)를 두었고 원종 12
년(1071년) 수주를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수원군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수주목(水州牧)으로 승격되었으나 충선왕 2년(1310년)에 다시 수원부(水原府)
로 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 3년(1394년)에는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양
광도에 속해 있던 수원부를 경기도로 편입하고 태종 13년(1413년)에 전국을 8도로
나누며 지방제도를 개혁할 때 수원도호부로 승격되었으나 중종 21년(1526년)에 부
민 중 부모를 죽인 사건으로 일시 군으로 강등되고 진까지 혁파되어 인천도호부로
옮겨졌다가 중종 30년(1526년)에 다시 수원도호부로 복구되었다. 그 뒤에 선조 8년
(1575년)에 화량진(花梁鎭)을 창설하고 수군절도사가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35년(1602년) 방어사(防禦使)를 겸하여 국방상의 요충지로 삼았음을 알 수 있
다. 그러나 『조선태종실록』에 의하면 태종 16년(1416년) 계미(癸未)에 왕이 ‘수원
부 오산(烏山)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세종 15년(1433년) 을사(乙巳)에는
‘대가가 수원부 오산원(烏山院)들에 이르니 부사 조극관(趙克寬)이 와서 뵈었다.’라
는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부터는 오산지역이 어느 정도 행정구역의
면모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선조 때의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이었던 조경남(趙慶男:1570〜1641년)
이 지은 『난중잡록(亂中雜錄: 1618년 간행)』에 의하면 선조 25년(1592년) 10월
18일 ‘적은 오산(烏山) 등 세 군데에 진영을 만들고 … 흉한 적이 수원 땅에 가득
하여 청회(靑回)오산의 들판에 적진이 나열 되었고…’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청회는 오늘날의 대원동 일대의 청호역(菁好驛 혹은 靑浩驛)을 말하는 것이
며 오산은 청회와 이웃하니 지금의 오산동 일대의 운암(雲岩)들판을 말함이라고 보
인다. 이런 기록은 『난중잡록』에서 또 보이는데 선조 32년(1599년) 7월에 ‘그 군
사 수만을 세 영으로 나누어 오산 등지에 헤쳐 늘어놓고 왕래하면서 싸움을 걸었
다.’라는 기록이 또 나오는 등 이와 같은 문헌상의 기록으로 보아 오산은 예전부터
한반도의 중심 지역으로서 군사적 요충지임은 물론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어
전쟁터로 수많은 고난과 주민의 애환이 서린 곳으로 보인다. 특히 최근에는 6∙25
한국전쟁 당시 오산의 죽미령 고개에서 유엔군이 최초로 인민군과 격전을 벌였다는
사실은 이런 전략적 요충지와 무관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의 기록은
이 외에도 신경(申炅 :1613〜1653년)이 지은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서도 보
이는데 ‘수만의 군사를 세진으로 나누어 오산역 등지에 진을 치고 왕래하며 도전하
였다.’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오산의 기원이자 연원(淵源)으로 보이는 수원의 오산 지역은 상고시대
부터 조선 중기까지 수없는 부침과 변화를 거듭하다가 안정적이며 확고한 행정구역
으로 정착한 것은 조선시대의 문예중흥기라는 영∙정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
다고 추정한다.
『조선영조실록』에는 사도세자가 온양으로 요양 차 갔다 환궁할 때에 독산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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