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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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 오산 연혁의 시작은 삼한시대 이전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역사학자 이병도에 의하면, 삼한시대 마한∙진한∙변한 등의 15개 소국 가운데의 일
부였으며, 이 중 마한은 약 54개의 부족국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지금의 오산과
수원 화성이 모두 이에 속해 있었던 모수(牟水)국 ∙원양(爰襄)국 ∙상외(桑外)국으로
이 중에서도 오산은 모수국(현재의 오산, 태안, 정남, 동탄, 양감, 향남, 봉담, 매송
면 일대)에 위치하였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이 설은 학자에 따라 위치 비정에 차이
가 있다.
모수국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토였으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의
하여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상외국과 함께 매홀군(買忽郡)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
뜻은 물꼴, 다시 말하면 습지나 물이 풍부한 땅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또 『삼국사기』권 제24 백제본기 제2 고이왕 5년(AD 238년) 2월조에 의하면 ‘왕
은 부산(釜山)에서 사냥하고 50일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많
은 역사학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부산이란 지명을 진위(振威)부산으로 해석하고 있
으며 진위현 전의 부산현은 현재 오산시 동쪽의 부산동 부근이며, 그 당시 이 지역
이 한성백제의 사냥터 곧 군사훈련장으로도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권 제23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溫祚王) 11년(기원전 8년)
7월조에 ‘독산책(禿山柵)∙구천책(狗川柵)의 양책을 설치하고 낙랑의 침략을 막았다’
는 기록과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내물이사금 18년(AD 373년)에 ‘백제의 독산
성주(禿山城主)가 남녀 3백명을 거느리고 항복하여 왔으므로 왕은 이들을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런 기록들은 오산의 독산성이 용인
과 더불어 호각지세를 이루며 격전장의 위치였음을 알 수 있는 반면 독산성이 작은
성이지만 성 주변에는 3백 명 그 이상의 주민이 생활했음을 알 수도 있다.
이러한 옛 문헌의 기록으로 보아 오산의 역사나 주민이 살았다는 증거는 약 2천년
이상으로 추정되며 청동기 시대인 삼한시대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오산
지역은 삼한시대와 삼국시대에 걸쳐 격전지로 되다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통치의 획일화와 능률적인 행정체제 개편에 따라 실시된 행
정구역 개편에 따라 백제, 고구려의 옛 땅들을 포함한 전국의 행정구역을 9주(州)로
통합하면서 매홀군은 한주(漢州)에 속하게 되었으며 수성군(水城郡)으로 개칭되기에
이른다.
또, 이때에 현재 오산시에 속한 진위 일부(갈곶동, 청호동, 고현동)는 부산현(釜山
縣)에서 진위현(振威縣)으로 함께 개칭된 것으로 미루어 오산 연혁의 기원은 삼한과
삼국시대 이전부터라고 단정 지을 수 있겠다.
『고려사지리지』에 의하면 고려의 태조가 후백제를 치기 위해 수성으로 남진할
때에 수성인 김칠, 최승규 등 2백여 명이 고려에 귀순하여 고려 건국에 공로가 인
정되어 태조 17년(934년)에 수성군에서 수주(水州)로 승격되었고, 그 뒤 고려 성종
14년(995년)에 지방 관제 개편 때에 수주의 별호를 한남(漢南) 또는 수성(隋城)이라
하고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 8년(1005년)에 혁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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