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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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기에 이르러 1941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관보 제447호(소화 16년 10
월 27일 발행 지방청 공문 조선총독부 경기도령 제26호)」에 의하여 성호(城湖)면
이 오산(烏山)면으로 개정되면서 비로소 오산 지역이 면으로서의 행정구역을 부여
받게 된다. 참으로 길고도 긴 변천의 역사에 처음으로 오산이 행정적 명칭의 시작
이었다. 그리고 1945년 조국 광복과 더불어 1949년 8월 15일 대통령령 제161호로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되면서 오산은 화성군 오산면으로 되면서 화성군 시대로 접
어들었다. 1960년 1월 1일 법률 제1175호로 오산면이 오산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7년 1월 1일 화성군 동탄면 금곡(金谷)3리가 오산읍으로 편입되어 은계(銀溪)리
가 되었다.
1989년 1월 1일에 비로소 오산시로 승격되어 실제적 오산만의 행정주체가 되어
오산만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1989년 오산시로 승격 당시에는 중앙(中央)동, 역촌(驛村)동, 신장(新場)동, 세마
(洗馬)동, 초평(楚坪)동, 남촌(南村)동의 6개 행정동이었으나, 역촌동의 동명이 좋지
않다는 주민들의 의사에 따라 1991년 8월 13일 「오산시조례 제253호」에 의하여
대원(大園)동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4월 20일 「대통령령 제14629호」에 의한
시∙군 자치구의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규정에 의하여 당시 평택군 진위면의 고현(高
峴)리, 청호(淸湖)리, 갈곶(葛串)리가 오산시 대원동으로 편입되었다.
오산시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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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시대 – 외삼미동유적에서 몸돌, 찍개, 여러면석기, 긁개, 홈날석기 등 17점.
(기원전 8~7만 년)
- 내삼미동유적에서 밀개, 몸돌과 양면찍개, 홈날, 여러면석기, 격지,
긁개 등 35점.
- 청호동유적에서 외날 및 안팎날찍개, 몸돌긁개, 여러면석기, 긁개,
밀개, 주먹도끼, 몸돌 및 격지 등 750점.(기원전 4~3만 년)
- 지표조사를 통해 알려진 갈곶동유적에서 긁개, 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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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 - 가장동유적에서 집터 1기, 소성유구 1기, 구덩이 유구 1기, 두 유구
신석기시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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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금암동(11기), 외삼미동(2기), 지곶동,가장동,수청동(소멸)의 고인돌.
내삼미동유적의 집터, 토기, 곡옥, 석기 등. 궐동, 청학동, 탑동 일원,
가장동의 주거지를 포함한 생활유적과 오산내삼미유적, 오산 탑동·두
곡동유적, 오산청학동유적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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