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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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랐다는 기록이 있으며, 정조 13년(1789년)에 부왕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
에서 현재 화성시 태안읍 송산리의 화산(花山)으로 이장하면서 화산에 있던 읍치(邑
治)를 수원 팔달산 기슭으로 옮기면서 5개 면의 명칭이 보이는데 오늘날 오산 행정
구역의 근간이라 생각된다.
정조 13년(1789년)에 간행된 『수원부읍지(水原府邑誌)』에 의하면 현재의 오산
지역은 청호(靑湖)면, 시봉(市峰)면, 삼미(三美)면, 산성(山城)면, 초평(草坪)면의 5개
면이 있었다.
청호면에는 오매(烏梅-현재의 오산동)리와 부산(釜山-현재의 부산동)리, 시봉면에
는 곡촌(谷村)리와 세교(細橋)리, 삼미면에는 중변(中邊)리와 자안(姿安)리, 금곡(金
谷)리, 산성면에는 지곶(紙串)리와 양산(陽山)리, 초평면에는 가사(加士)리와 사오화
(沙五火)리가 속해 있었는데 대부분 오산의 현재 자연부락명과 뜻이 통하는 마을이
다.
또, 정조 17년(1793년)에 간행된 『수원부읍지』 앞에 나오는 지도에는 청호(靑
好), 초평, 삼미, 산성, 어탄(魚呑:현재의 동탄면)일부가 현재의 오산 지역에 속했다.
그리고 그 이후 순조 31년(1831년)에 발간된 『화성지(華城誌)』에서는 4개면으로
문시(文市)면은 시봉면과 삼미면이 통합하여 되었으며 범 8동으로 명학동 ∙죽담점 ∙
묵암동 ∙신촌 ∙옹동 ∙평촌 ∙세교 ∙관음동 등의 방리가 나오고, 산성면에는 범 5동으로
서리 ∙남리 ∙지곶리 ∙신촌리 ∙양산리가 있으며, 청호면은 범 7동으로 갈곶리 ∙기문동
∙당리 ∙원통리 ∙부산동 ∙수덕동 ∙천변동 등이며, 초평면은 범 10동으로 수철리 ∙누읍
리 ∙타종리 ∙마유동 ∙신촌 ∙모전촌 ∙용란리 ∙서촌 ∙여대리 ∙내창동 ∙어은굴리 ∙대화촌 ∙
궁기리 ∙어인포 등이 나타난다.
그리고 고종 33년(1896년)에는 4개면으로 청호(晴湖)면, 문시면, 산성면, 초평면
등으로 되었다. 그리고 1914년 4월 1일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에 경기도 소
재 면 명칭과 일부 구역이 바뀔 때에 오산은 산성, 문시, 청호, 초평 등의 4개면과
어탄면 일부를 통합하여 성호면으로 수원군에 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기록들은 오산이 행정구역상의 정식 명칭이 아니라 속칭(俗稱) 오산의
의미뿐이며 행정구역상의 오산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을 살펴보면, 1915년 조선총
독부의 관보(官報:서울대학교 소장) 제757호(대정 4년 2월 13일 발행)의 조선총독
부 고시 제4호 수원군 면내 동리의 명칭 변경 구역 통보에서 성호면 편에 독(篤)동
∙궐(闕)리 ∙죽전(竹田) ∙궁대(宮垈)를 병합하여 궐(闕)리로, 가장동은 가장리로 청학동
은 청학리로, 서촌은 서리로, 누읍리는 그대로 누읍리로, 가수동은 가수리로, 벌음
리는 벌음리로, 두곡은 두곡리로, 탑동은 탑리로 1동을 부산리로 2동과 3동을 합쳐
원리로, 4동과 5동을 합쳐 오산리로, 양산동을 양산리로, 서랑동을 서랑리로, 남서
동과 지곶동을 합쳐 지곶리로, 세교동과 문시면 세교등을 합쳐 세교리로, 외삼미를
외삼미리로, 묵암을 금암4리로, 내삼미와 죽미를 합쳐 내삼미리로, 수청동 ∙독동 ∙남
산동을 합쳐 수청리로 하였으니 비로소 리(里) 명칭이기는 해도 행정구역상의 정식
명칭으로 오산리가 최초로 등장하게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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