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4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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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산성 남문. 지금은 진남루라 불리는 누각과 성문은 사라지고 없다. 독산성에서는 가장 큰 문이다.
이 성에는 사도세자와 정조의 사적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독산성에는 사도세자와 그의 아들인 조선 제 22대 임금인 정조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잠시 이야기를 따라가 보도록 하자.
독산성의 주 통로였던 남문에는 누각이 있었는데, 누각 이름이 진남루(鎭南樓)였
다. 현재 이 누각은 훼손되어 없어졌다. 1760년(영조 36년)에 온양온천 행차 후 환
궁하던 사도세자가 독산성을 휘감고 흐르는 황구지천의 세람교가 장마로 범람하여
황구지천을 건널 수 없게 되자, 독산성 안 남쪽에 있는 운주당(運籌堂)에서 하루 유
숙하게 된다(경진년경숙 庚辰年經宿). 이날 사도세자는 성 안의 부로(父老)들에게
질고(병고)를 묻고 창고의 곡식을 출연하여 하사하였으며, 진남루에 올라 활 1순을
쏘아 연달아 4발을 얻었고 다음날 아침에 독산성을 떠났다한다. 그로부터 30년 뒤
1790년(정조 14년) 2월에 정조는 융릉(사도세자 릉) 원행 때에 서문을 통해 독산성
에 올라 운주당에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경진년 사적을 살피게 된다. 이날 정조는
성안의 부로들을 부르고 무엇으로 생계를 이어가는지 물었으며, 또 성 안의 부로들
을 위로하고 명을 내려 승속(僧俗)과 나이를 불문하고 이들에게 특별히 경진년경숙
때보다 한 자급을 더해주고 성안의 민호마다 쌀포대를 지급하게 하였다. 장병들에
겐 승진과 시상을 하였다. 그리고 이 남문의 진남루에 올라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
억하고 아버지의 위민정신을 기리고, 백성을 위한 위민정치를 실천하고자 다짐하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사도세자는 조선의 영명한 군주가 되어 자신을 찾아 온 아
들 정조를 이곳 독산성에서 영혼으로나마 부자 상봉을 하게 된 것이다. 정조는 이
곳에서 가슴에 맺힌 아버지에 대한 아린 한을 풀어내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추념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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