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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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은  독산성  주위  3곳에  진을  치고  고립시킨  다음  공격하여  왔지만  권율은  매복
                  과  기습전을  펼치며  성문을  닫고  지켜나갔다.  지형적인  조건을  자세하게  살핀  적장
                  은  성안에는  물이  별로  없을  것이라  여기게  되었고,  부하에게  물  한  지게를  지어
                  산  위에  있는  권율에게  갖다주게  하였다.  사실  독산성엔  물이  부족하여  극심한  식
                  수난을  겪고  있었다.

                    권율은  즉시  성  아래의  적군이  잘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올라가  흰  쌀을  말위로
                  쏟아붓게  하였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본  적장의  눈에는  물이  넘치는  것으로  보였다.
                    이렇게  독산성에서  전의를  상실하고  있던  차에,  남부지방에서  모여든  의병들이  왜
                  군의  후방에서  포위망을  좁혀오자  조급해진  왜병들은  마침내  포위망을  풀고  한양으
                  로  퇴각하기에  이른다.  왜군은  5일간  독산성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과천을  거쳐  한
                  양으로  퇴각하는데,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적의  퇴로를  기습하여  수많은  적병을  살상

                  하였는데  봉담면의  ‘삼천병마골전투’는  이때의  전승지인  것이다.
                    권율은  1593년  1월  중순까지  독산성에  머물다  행주산성으로  이동했다.  그  후  권
                  율은  1593년(선조  26년)  2월  12일  하루  만에  행주대첩에서도  이겨  서울을  다시  찾
                  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  독산성  전투가  밑받침이  되어  행주산성에서  하루

                  만에  왜적을  섬멸하게  된  것이다.  행주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도대첩과  김시민의  진
                  주성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이라  불린다.































                       세마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가  권율의  세마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장군의  지휘소.




                    이  독산성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여  선조의  명령에  따라  장대가  건립됐고,  세마대
                  (洗馬臺)라  불리게  됐다.  몇  번의  중수를  거치고,  그  후  일제강점기  때  일인들의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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