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8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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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는 기록과 신라 내물이사금 18년조(백제 근초고왕 28년)에 “백제의 독산성주
가 남녀 300명을 거느리고 항복하였으므로 왕은 이를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라는 기록도 보인다. 이 기록에 보이듯이 독산은 기록상 오산 최초의 지명
이기도 하다.
남문에는 진남루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독성려왕릉에 대한 이야기가 전
하고 있다.『기전영지(畿甸營誌)』「수원도호부 고적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
사가 실려 있다.
“독성려왕릉(禿城麗王陵)은 수원도호부 남쪽 삼십 리에 위치한 독성산성에 있다. 경
진년(1760년) 장헌세자(사도세자)께서 온양온천 행차 시 독산성 진남루(鎭南樓)에
이르렀을 때, 본부중군(本府中軍) 이두환(李斗煥)에게 교시하기를 이곳에 어떤 고적
이 있느냐? 하니, 이두환이 대답하기를 진남루 아래 긴 산기슭에 큰 무덤(大塚) 하
나가 있는데, 예로부터 여왕릉(麗王陵)으로 불린다고 하였다.”
이 기사의 독성려왕릉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점이 흥미롭다. 지금까지 연구된
설 중 여러 시대, 왕 또는 왕족을 비정하는 설 등이 있으며, 독성려왕릉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여러 설중에서 백제의 제16대 왕 진사왕 여휘
(餘輝)의 능으로 비정하는 설을 흥미롭게 보고 있다. 향토사학자 임종삼은『독산성
2002, 오산문화원』에서 독성려왕릉의 려(麗)를 진사왕의 이름(휘)인 여휘의 여(餘)
로 보고, 진사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공격해오자 진
사왕(백제 제14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고 제15대 침류왕의 아우이며, 침류왕 사
후 태자 아신이 어려 태자의 숙부인 진사가 왕위에 대신 오름)은 싸울 생각은 않고
구원(지금의 부산동, 갈곶동 등지라는 설)에서 사냥만하다가 10일이 되어도 돌아오
지 않았다. 그 해 11월 왕이 구원행궁(지금의 융·건릉 부근이라는 설)에서 갑자기
죽어 아신왕(제17대왕)이 등극했다는『삼국사기』의 기록과, 백제 진사왕이 무례하
여 왜왕 응신이 기각숙니, 우전숙니, 석천숙니, 목토숙니를 보내어 그의 허물을 책
망하니 백제국이 진사왕을 죽여 사과하였다는『일본서기』의 기록을 근거로 아신의
등극 과정을 아마도 아신이 정변(아신세력이 여휘를 살해하고 본래 자신의 정권을
되찾음)을 일으켜 정권을 잡지 않았겠는가하는 해석을 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한
발 더 나아가 정권을 잡은 아신왕이 정적인 죽은 진사왕을 도성인 한성에 옮기지
않았고, 독산성 남쪽에 장사지냈다는 설이다. 임종삼은 그래서 왕릉이 이곳 독산성
남쪽에 있게 됐으며, 진사왕릉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독산성 남쪽 통봉에 비정까지
한다. 임종삼은 『독산성2002, 오산문화원』에서 이 설을 제기할 때 통봉의 발굴을
건의 제안한 적도 있다. 우리는 이 독성려왕릉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연구해볼 필요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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