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6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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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의 대표적 유적지, 독산성
1. 독산성의 구조와 독성려왕릉
오산은 예로부터 군사전략상 요충지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한강 유역 선점을
위해 벌이는 전쟁의 참화를 비껴갈 수 없었다. 또 고려시대에는 서해안 내륙(수원,
안성)에까지 왜구들의 노략질이 빈번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독
산성전투(세마전투)가 조선의 안위를 결정짓는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고, 그리고 최
근에는 김일성이 일으켰던 6.25전란까지도 오산은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오산
의 방어선 구축이 각 시대 공히 독산성과 그 주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독산성의 구조와 역사, 의미를 알아보도록 한다.
독산성은 오산시 지곶동에 석대산, 향로봉이라고도 불렸던 독산(禿山)에 소재하는
삼국시대 백제시대에 처음으로 축성되었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산성이다. 삼국시
대에는 독산성, 조선시대에는 독성산성, 독성, 독산성, 독왕산성, 독추성 등으로 불
리다 세마대첩 이후에는 세마산성으로도 불리었다. 지금은 독산성으로 통일됐다.
독산성에는 권율장군의 기념 장대인 세마대와 군진의 사찰인 보적사가 함께 있다.
독산성과 세마대 터를 함께 묶어 사적 140호(烏山禿山城과洗馬臺址)로 지정되어 있
다. 독산성의 축성 형식은 산 정상 80% 능선에 세운 테뫼식 산성이다.
둘레 1,095m의 성이며, 2019년 발굴조사로 삼국시대 신라가 돌로 쌓은 석축산성
으로 새롭게 확인되었으며,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개칭된 수성군(水城郡)의
읍치로 이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통일신라~고려 초까지 어느 시점에 치소
가 독산성 아래 수원고읍성(융릉주변)으로 이전되고 수주(水州)라 불렸던 것이다.
조선 전기, 임진왜란 때에는 토성으로 추정되며, 조선 선조 27년(1594년 임진왜란
중)에 경기도 관찰사 유근이 백성들과 함께 4일 만에 수축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 35년(1602년)에 방어사 변응성이 석성으로 수축하였다. 정조 16년에는 약 70
일간 신축에 가까운 대규모의 수축을 진행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독산성에 대
한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축성 기법은 성의 높이가 높지 않아 수직에 가까운 각도
를 주어 축석되었다. 수구 2개, 우물 1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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