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1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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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재현하고자하는  예술인,  무인들의  활동이  보인다.  2015년  제6회오산독산성문

                  화제의  일환으로  <이  시대의  마지막  예인,  경기도당굿의  정점  이용우  선생의  삶과
                  예술  2015심포지엄>이  오산문예회관  소공연장에서  열리기도  했다.
                    세습무야말로  노래,  춤,  재담,  놀이가  어우러진  우리의  전통예술이다.
                  경기도당굿은  소리나  춤사위,  장단,  굿에서  사용하는  음악  등이  독창적인  특징을  갖
                  고  있다.  경기도당굿의  예술적  가치는  매우  높다.  도살풀이,  태평무,  승무  등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된  무용이  경기도당굿의  장단을  이용하고  있으며,  그  이외에
                  도  터벌림,  진쇠춤  등  많은  전통춤들이  경기도당굿을  모체로  하여  창출된  것이다.
                  경기도당굿은  한국전통예술의  근원인  것이다.  무속을  미신으로  터부시  하지  말고
                  한바탕  신명나는  우리  민족의  혼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이  세습놀이에  우리의  신
                  명이  녹아  있는  것이다.
                    경기재인청  도대방은  부친  이종하,  도산주는  숙부  이종만이었다.  경기재인청이  폐

                  청이  된  후에도  뒤를  이용우가  이어  받아  정신적인  지도자가  되어  경기도당굿에  대
                  한  집념과  열정이  팔순을  넘긴  나이까지도  멈춤이  없었는데,  1980년에  부천의  조한
                  춘을  만나  경기도당굿  활성화를  시도했고,  1982년에는  국립극장에서  오수복과  함께
                  공연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제자  오수복은  이용우  선생의  추억을  떠올리며  인터뷰

                  에  응한  그의  말에  의하면  이용우  선생은  조금도  빈틈없고  너무  무서운  분이셨다고
                  기억한다.  그의  뛰어난  재능을  귀히  여겨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한  서류를  올렸으나
                  사망하는  바람에  지정받지는  못했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으나  아들들은  경찰직,
                  철도청  등에  취직하고,  아무도  무업을  이어가지는  않았다.  선생은  말년에  부인  손주
                  와  함께  오산시  부산동  새말에서  살았다  한다.  1987년  88세  때,  안성저수지  근처에
                  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부인도  인천  쪽으로  이사했다고  전한다.

                    경기도  도당굿의  마지막  화랭이  이용우  세습무가는  자식들의  타  직업으로의  전환
                  으로  가계전승이  되지  못하고  끊긴  것이다.  그렇지만  제자들의  전승으로  이어져  보
                  존  재현의  노력이  있고,  성과도  있음으로  다행한  점이다.  그리고  하나  확실한  것은
                  오산은  경기재인청  본청이  있던  곳으로  경기도당굿의  성지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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