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0 - 오산시 역사문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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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하고,  왜군의  살육과  약탈은  수원  인근까지  자행되고  있었다.

                    용인전투  대패  이후  1592년(선조25년)  6월  23일에는  새로이  호남  의병장  김천일
                  이  3000명의  군사와  함께  북상하여  독산성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간민을  찾아내어
                  목을  베니,  돌아와  따르는  기내의  사민이  많았다.  그리고  김천일은  종사관  송제민으
                  로  하여금  충청도  의병의  모집을  지시하였다.  수원부사  출신이기도  한  김천일은  장
                  례원판결사에  임명되고  창의사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곧  강화도로  들어갔으며,

                  그  대신에  종사관인  송제민을  독산성에  남겨두었다.
                    9월  조정은  홍계남을  수원판관에,  9월21일에  조경을  수원부사로  임명하였고,  이들
                  은  훗날  휘하  병력을  이끌고  권율  휘하로  들어간다.
                    한편  전라순찰사  권율은  이치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방어사  황진에게  이치를  지키
                  게  하고,  도내의  병력을  재정비하였다.『난중잡록』에  의하면  1592년  9월  22일에
                  권율은  휘하  장수들에게  “지금  평양  이남이  모두  적의  진지가  되어  버렸지만,  도성

                  은  근본이  되는  곳이니  먼저  도성을  수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군사  1만여  명을  거
                  느리고  북진을  하자  각  고을  수령과  의승장  처영  등이  함께  따랐다.
                    권율  휘하에는  수원부사로  조방장에  임명된  조경,  의병장  변사정,  의승장  처영,  전
                  라도  병사  선거이,  초모사  변이중,  의병장  임희진  등으로  이루어졌고,  10월에는  직

                  산에  도착하여  양남도체찰사  정철을  만났다.  정철의  명령으로  북진을  멈추고  관내
                  를  지키고  있었다.
                    이  상황을  행재소에  상황을  보고하자,  선조는  차고  있던  검을  하사하며  “모든  장
                  수중에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있으면  이  칼로  처단하라”고  하였다.  이에  권율은
                  북상하여  1592년  12월에  독산성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였다.  더  이상  북상하지
                  않은  이유는  지난날  백광언을  따라  북상하여  용인전투에서  무리한  공격을  하여  패

                  한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편  한성에  주둔하던  왜군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는  권율이  호남에서  대군을
                  이끌고  북진하여  독산성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후방과의  연락  및  보
                  급선이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도성에  주둔한 왜군을  독산성으로  급파하였다.
























                                               임진왜란,  독산성의  세마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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